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자 정도전이 즉위교서를 지었다. 요새로 말하면 취임사이다. 이 즉위교서에 정도전은 '편민사목(便民事目)' 17개조를 포함하였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들이라는 뜻인 '편민사목'에 포함된 내용은 관혼상제, 수령, 전곡, 역관, 호포, 형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 고려 왕족과 충신들의 처리 문제도 포함하였다. 새 왕조가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열망을 담았다. 이 즉위교서를 보면 정도전이 이루려고 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정도전은 태조 3년(1394) 5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저술하여 태조에게 바쳤다. 태조가 이를 보고 감탄하여 칭찬하면서 구마(廐馬 : 어용御用을 위하여 기르는 말)와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백은(白銀)을 상으로 주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 개국의 기본 강령(綱領)을 논한 규범 체계서이다. 이 책은 정보위(正寶位)·국호(國號)·정국본(定國本)·세계(世系)·교서(敎書) 등으로 나누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했고, 뒤이어 동양의 전통적인 관제(官制)를 따라서 육전(六典)의 관할 사무를 규정하였다.
이 책은 '주례(周禮)' 천관(天官) 대재(大宰)와 '대명률'(大明律)을 바탕으로 치전(治典), 부전(賦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工典) 등을 대강(大綱)으로 하고 각 전 아래에 세목을 열거하여 치국의 대요와 모든 제도 및 그 운영 방침을 정함으로써 조선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한 것이다.
정보위(正寶位)는 보위, 왕위를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태조가 등극한 근거를 논하고 영원하리라는 것을 설명했다.
" 인군은 천지가 만물을 생육시키는 그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서 불인인지정(不忍人之政 : 仁政)을 행하여, 천하 사방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기뻐해서 인군을 마치 자기 부모처럼 우러러볼 수 있게 한다면, 오래도록 안부(安富), 존영(尊榮)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요, 위망(危亡), 복추(覆墜: 뒤집히고 추락하는)의 환란을 끝내 갖지 않게 될 것이다. 인(仁)으로써 자리를 지킴이 어찌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조선경국전>)
정도전은 임금이 인정(仁政)을 베풀면 왕위를 위협받지 않고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정이란 천지가 만물을 생육시키는 그 마음이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것은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보위에 있어 세상을 어지럽히면 인한 사람이 보위를 바루어야 한다.
"주상 전하는 천리와 인심에 순응하여 보위를 신속히 바루었으니, 인(仁)은 심덕의 온전한 것이 되고 사랑은 바로 인의 발로임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바루어서 일을 체득하고, 사랑을 미루어서 인민에게 미쳤으니, 인의 체(體)가 서고, 인의 용(用)이 행해진 것이다. 아! 위(位)를 보유하여 천만세에 길이 전하여 질 것을 누가 믿지 않으랴!"(<조선경국전>)
정국본(定國本)은 국본을 정한다는 뜻이니 곧 세자(世子)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세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정도전은 세자는 반드시 장자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는 "옛날의 선왕(先王)이 세자를 세우되 반드시 장자로써 한 것은 왕위 다툼을 막기 위한 것이고, 반드시 어진 사람으로써 한 것은 덕을 준중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천하 국가를 공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님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옛날의 선왕은 노성(老成: 나이가 들어 경륜이 풍부한)한 학자와 덕행이 뛰어난 현인을 택하여 세자의 사부로 삼고, 단정한 사람과 정직한 선비를 세자의 요속(僚屬)으로 삼아서 세자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고 강조했다. 선왕은 세자의 교양이 부족하면 덕업이 진취되지 않아, 부탁한 중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태조는 즉위 초에 세자를 세우고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書筵官)을 두어 조준, 남재, 정총, 정도전 등을 세자 사부와 세자 이사(貳師)에 임명하였다.
정도전은 비록 학문이 소략하여 세자의 덕을 제대로 보필하기는 어려우나 마음속으로는 항상 책임감을 잊지 않았다고 하였다.
세자 이방석은 어떻했는가?
"지금 우리 동궁은 뛰어난 자질과 온화한 성품으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부지런히 서연에 참여하여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 일취 월장하여 반드시 그 학문이 광명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 기대된다. 세자의 위를 바루어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조선경국전> '정국본')
하지만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이방석은 죽음을 당하고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도성을 떠난다.
교서(敎書)는 제후의 말이다. 교서를 통해 그 시대의 운위(云爲)한 바를 살필 수 있다. 태조의 교서는 어떠하였는가. 먼저 이성계가 어떠한 인물인지 보자.
"우리 전하(태조)는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유사(儒士)와 함께 경사(經史)와 제자(諸子)를 읽어서 의리를 강명(講明)하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정치의 성공한 일과 실패한 일을 토론하기를 좋아하여 이에 모두 능통하였다. 문장은 비록 여사(餘事: 덕행이외의 일)이지만, 학문이 지극해서 대개 자득하는 일이 많았다. "
무장(武將)이지만 태조는 유학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정치의 득실(得實)을 토론하기를 좋아하여 이에 모두 능통하였다. 학문에도 상당한 소양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이성계와 함께한 정도전의 평가이기는 하지만 이 내용을 보면 이성계는 신흥사대부들과 성향이 동일했음을 알 수 있다. 교서에는 이성계의 뜻이 반영되었다.
"이제 유신의 시기를 맞이하여 기강을 확립하고 백성들과 함께 새로이 정치를 시작하여 여러 차례 교서를 내려 중외에 교시하였다. 교서는 비록 문신이 지어 바친 것이지만 교서에 담긴 명의(命意)는 모두 전하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며, 토론하고 윤색하여 의리에 맞게 한 것은 또 붓을 잡는 자가 능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니, 이를 편에 적어서 일대의 법전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조선경국전>)
치전(治典), 부전(賦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工典) 등의 내용은 한영우(韓永愚) 교수의 <조선경국전> 해제를 참고로 하여 정리한다.
<조선경국전> 치전(治典)에서는 군신(君臣)의 직능과 관리 선발 방법을 항목별로 제시한다. 여기서는 재상(宰相)이 정치ㆍ경제ㆍ군사 등 모든 통치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재상은 자신을 바루고서 인군을 바루며, 인재를 잘 선택하고,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다. 정도전은 '자신의 생각을 바루고 인군을 바룰 것'이 치전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또 관리 선발이 고시(考試)제도에 의거하여 능력 본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부전(賦典)의 부는 군국의 수요를 총칭하는 말이다. 부전에서는 국가의 수입과 지출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군현 제도ㆍ호적 제도가 정비되어야 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해야 하고 국가 수입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토지소유를 균등하게 하고 병작반수(並作半收)를 금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었다. 부전(賦典)의 기본원칙은 민생을 균등하게 안정시키면서 국가 수입을 증대시켜 국리(國利)ㆍ민복(民福)의 조화를 꾀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예전(禮典)에서는 조회ㆍ제사ㆍ교육ㆍ외교ㆍ기타 관혼 상제 등에 관련된 의례의 원칙을 제시한다. 정전(政典)은 병전(兵典)에 해당한다. 병전을 정전이라 한 것은 병제가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바르게 하는 정인(正人)의 도덕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입장에서이다.
헌전(憲典)은 형전(刑典)이다 . 정치는 기본적으로 인(仁)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 정치 즉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중요한 것이지만, 도덕만으로는 불가능한 때가 있으므로 도덕 정치를 보조하는 수단으로서 형벌의 필요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형벌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보조 수단이지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형벌과 법은 어디까지나 예방수단으로서 이용되는 것이 이상적이라 한다.
공전(工典)에서는 국가의 각종 물품 제조나 토목공사를 운영ㆍ집행하는 원칙으로서 사치를 금할 것과 재정 낭비를 경계할 것, 그리고 백성의 노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피곤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선경국전>은 나중에 만든 <경국대전>의 모태가 되었다. 정도전은 중도에 좌절하였으나 그가 꿈꾼 나라는 이루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