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눈, 눈, 새하얀 꿈의 세상. 강원도 평창 오대산 일대는 집도 하얗고 길도 하얗고 들과 산도 온통 두터운 눈이불에 덮여있다. 이 눈사막 속에서 사람과 들짐승들은 하얀 적막을 어떻게 지새고 있을까.... 흰 도화지 위에 봄을 그리는 겨울잠 꿈을 꾸고 있을까?

▲ 강원도 평창 오대산 일대는 집도 하얗고 길도 하얗고 들과 산도 온통 눈이불에 덮여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도회지에서 눈을 잃어버렸다. 눈을 밟으며, 눈에 빠지며 거닐던 덕수궁 돌담길이나 남산 오솔길에 관한 추억은 빛바랜 사진에 갇혀 버린 지 오래다. 어쩌다 눈이 내리더라도 쌓이기가 무섭게 잿빛 도시 색깔에 오염돼 버린다. 그래서 시골에 함박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가운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 강원도 평창에서는 눈이 오면 설피를 신는다.

평창에 가면 눈에 관한 한 우리의 그리움을 듬뿍 속채워줄 눈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토종 눈, 우리 민속스키인 산형썰매, 전통 눈신 '설피', 강원도 전래의 겨울철 사냥 유물인 '멧돼지 창' 등이 눈과 더불어 옛얘기를 들려줄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평창군 도암면 차항 2리는 강원도에서도 유달리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다. 이곳엔 지난 1월 중순 허리까지 내린 폭설이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뿐 전혀 녹지를 않고 있다. 이런 눈 덕분에 예전엔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자주 열리곤 했다. 지금도 해마다 해병대와 육군 특전사가 스키훈련캠프를 연다.

 

차항2리 사람들은 예전의 그 전국체전 스키대회장 자리에 '자연눈썰매장'을 만들어 겨울 손님을 맞는다.  이름은 '대관령 자연설 썰매장'. 이름 그대로 우리나라 최대, 유일한 신토불이 천연눈썰매장이다. 이 썰매장에 들어서면 우선 가슴이 확 열리는 청량감을 맛보게 된다. 1만여 평의 고랭지 채소밭에 들어선 '채전백해(菜田白海) 썰매장, 그 주위 흰 산등성이와 파란 하늘이 만나는 곡선의 신선한 아름다움, 그리고 발바닥에 와닿는 자연설의 부드러운 감촉과 귀에 익숙한 "뽀드득~ " 소리, 이들은 우리 정서의 한 자투리에 억눌려 있던 '토종 겨울'을 끄집어내 주기에 충분하다.

차항 2리 사람들은 이 자연설썰매장에 토속분위기를 더욱 불어넣기 위해 겨울철 전통 생활도구들을 갖다 놓고 시범을 보여준다. 강원도 지방의 눈살이 필수품인 설피, 산형(山形) 썰매(현지에서는 '사형썰매'라고 부른다.), 멧돼지창 등이 그것이다. 이 마을 50대 이상 남성들은 모두 설피 및 산형썰매 타기와 멧돼지 창사냥의 명수들이다. 이들은 당번을 정해 번갈아 썰매장에 나와서 예전 자신들의 겨울철 일상을 손님들에게 보여준다. 

산형 썰매

자연설썰매장에서 설피와 산형썰매는 정말 진가를 발휘한다. 거기에는 플라스틱 현대 썰매와 훈련중인 군부대의 서양 스키가 있어서 비교가 잘 된다. 산형썰매는 이름은 '썰매'이지만 폭이 넓고 길이가 비교적 짧아서 스키와 썰매의 기능을 다 갖추고 있다. 선 자세에서 '스키'로 타기도 하고 앉은 자세에서 '썰매'로 타기도 한다. 리프트가 없는 썰매장에서 서양스키와 플라스틱 썰매는 한 번 내려왔다가 출발점으로 다시 올라가려면 여간 애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 설피와 산형썰매, 그리고 멧돼지 창은 삼위일체로 조화를 이뤄 기동성을 발휘한다. 산형썰매를 타고 일단 미끄럼길을 질주해 내려온 다음 다시 출발점으로 오를 때는 설피로 갈아 신는다. 푹푹 빠지는 옆길이나 미끄럼길을 바로 오르는 데도 보통 길을 가듯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멧돼지 창은 출발점으로 오를 때나 하강을 할 때 '스틱' 노릇을 해준다. 이처럼 눈 속에서 살던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오늘날 그 눈과 더불어 다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것을 되돌아보는 일의 흐뭇함을 일깨워 줄 것이다.

 

■차항리 가기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횡계인터체인지로 들어간다. 인터체인지에 진입하자 마자 횡계리쪽(좌회전)으로 들어가지 말고 우회전하여 용평(휴게소)주유소 앞을 지나간다. 용평주유소에서 2km쯤 가면 차항2리 들머리가 나오고 '눈썰매장' 가는 길을 가리키는 팻말이 서 있다. 그 팻말을 보면서 우회전하여 눈길을 3km쯤 가면 차항2리 눈썰매장이 나온다. 차항2리 들머리에서 썰매장까지의 눈길은 매우 미끄러우므로 체인을 준비해 가야 한다. 숙식은 횡계리로 나와서 해야 한다. 횡계리에는 호텔 2곳과 장급 여관이 많다. 문의

설피  산형썰매 멧돼지창

차항2리에 가면 요즘 제자리에서, 제철에, 제맛나게 만나볼 수 설피, 산형썰매, 멧돼지창이 있어서 '눈여행' 맛을 더해준다. 설피와 산형썰매는 눈 많은 강원도에서 찻길이 없던 시절에 사람이 오가는 데 필수도구였다. 이웃간에 왕래는 물론 사냥을 할 때 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신발에 덧대어 신는 것이 설피와 산형썰매다.

설피는 다래나무 줄기를 구부려서 타원형 뼈대를 삼고, 그 가운데를 가로 세로로 물푸레나무 넝쿨로 엮었다. 산형썰매는 20년 이상된 고로쇠나무를 폭 25cm, 길이 80cm의 크기로 쪼개서 소여물 가마솥에 푹 삶아 누글누글해지면 틀에 넣어 끝머리를 구부려 만든다. 끝머리 안쪽은 인두로 지져서 여러개의 가위표 무늬를 만든다. 그러면 굽은 데가 쉬 펴지지 않고 멋스럽기도 하다. 고로쇠나무는 재질이 단단해서 갈라지거나 부러지지 않고 결이 좋아 눈 위에서 잘 미끄러진다.

설피나 산형썰매는 사람의 체질이나 적응도에 따라 골라 쓴다. 설피가 걷는 데는 더 자유스럽지만 산비탈 사냥에서 속도가 필요할 때는 산형썰매가 더 좋다. 산형썰매는 모양이 스키와 비슷해서 '전통스키'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좁고 긴 서양 노르딕 스키 보다는 폭이 넓고 길이가 짧은 산형썰매가 우리 산악지형에 맞아 군부대에서도 스키를 산형썰매로 바꿔가고 있다.

설피나 산형썰매를 신으면 눈이 1m 이상 쌓여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노루나 멧돼지들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서 평소에 산짐승들이 잘 다니는 길을 알아두었다가 눈위로 발자국을 따라가 웅크리고 있는 노루를 그대로 안아오는 수도 있다. 그러나 멧돼지는 사나워서 창으로 잡아야 한다. 예전 강원도 산간지방엔 푸줏간이 없어서 겨울철 유일한 고기조달 방법이 멧돼지 창사냥이었다. 멧돼지창은 강원도 탄광지대에 널려있는 밀차(철로 위에서 사람이 밀어서 가는 석탄운반용 차량)나 낡은 철로의 쇠붙이를 떼어내 대장간에서 만들었다

 전 한겨레신문 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