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답사는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을 다녀왔다. 무더운 초여름의 태양아래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경복궁을 찾았다.  절반 이상이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경복궁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적지임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경복궁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했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했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인 '경복(景福)'이라는 궁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하였다. 
▲ 조정 연회를 열거나 사신접대를 한 장소로 활용한 경회루.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를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잔잔한 물 위에 비친 경회루를 바라보며 수양버들 아래 앉아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미학의 절정이라고 하는 경회루. 이곳에 조선시대 왕들에 얽힌 사연들이 많이 있다. 그만큼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함께 한 경회루 곁에 앉으니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떠오르며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경회루 연못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교태전 뒤편에 있는 아미산(蛾眉山)이라는 왕비를 위한 동산을 만들었다. 교태전의 굴뚝이 있는 계단식 화단으로 아름다운 굴뚝은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만든 정원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기도 했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둘만의 사랑으로 마냥 행복할 수 없었던 왕들의 사랑이 안쓰럽기도 했다.
▲ 경복궁의 중심 근정전.
왕자의 난 등 조선 초기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다. 왕의 공식 집무실인 사정전에서 매일 새벽 3~5시 사이에 '상참'이라는 어전회의가 열었는데, 세종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상참에 참석했다고 한다. 역시 성군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정전 앞에는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인 근정전이 있다. 2층 월대 위에 장엄하게 서 있는 건물로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공식 행사나 조회 등에 사용한 건물이다. 근정전 월대 난간에는 주작, 백호, 현무, 청룡의 사신과 십이지신이 각 방위에 따라 새겨져 건물을 지키고 있다. 위엄 있는 근정전에서 귀여운 형상의 조각물들을 보니 우리 조상들의 해학과 친근함, 인간미가 느껴진다.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던 강녕전과 교태전,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놀라게 된다. 조선 시대 왕들은 검소하고 청빈한 삶, 백성들에 모범이 되는 것을 중요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백성들을 사랑한 지도자는 모범이 되었고, 사리사욕을 취한 폭군들은 많은 세금으로 화려한 생활을 했음을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다. 그것은 현대에 와서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나라를 다스리던 곳,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말았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하지는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 아늑하고 여성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향원정.
궁이 중건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경복궁 중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여 무리하게 공사를 감행하는 바람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게 되었고, 흥선대원군도 민심을 잃게 되었다. 위엄이라는 것은 외부의 것으로 인해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이곳에서도 알 수 있다.
 
경복궁 중건 후 얼마 되지 않아 경복궁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건청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세운 건청궁. 고종이 세운 궁 안의 궁, 건천궁은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극의 장소가 된 것이다. 아늑하고 아름다운 향원정을 앞에 두고 방문객도 많지 않아 조용한 건청궁은 명성황후의 참혹한 죽음과 비극을 모르는 듯 그렇게 아프게 서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니,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아관파천 이후 조선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장소. 건청궁.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다.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누각 등 궁의 90%이상인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버렸다.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짓는데 사용했다.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총독부청사를 지어 궁궐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본인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국립박물관으로도 쓰여졌다. 구 총독부청사는 1995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다. 일제에 의해 건물이 훼철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 복원 공사가 1991년부터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궁 내부에 복원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 광화문을 지키는 해태상.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왕실문화를 복원, 재현하고 있는 모습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옳지 않은 일을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뿔로 받아버린다는 상상 속 영물인 해태가 지켜주고 있는 광화문과 경복궁. 나라의 지도자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 주기를 바라며, 다시는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답사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