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출발 서울성곽 남산구간을 거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방문했다.

  우리민족과 서울의 상징인 남산의 고유이름은 목멱산이라 하였는데, 도성의 남쪽에 있어 남산으로 불렀다.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중의 하나이다.  남산골한옥마을은 옛 선조들의 생활 모습을 보고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골짜기에 정자를 짓고, 전통정원을 조성하고, 사대부의 집에서부터 일반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전통 한옥 다섯 채가 있다. 옛 모습과 쓰던 물건을 그대로 전시하여 책으로만 접하던 그 시대의 선조들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방이 생각보다 작다.  사람이 사는데는 저만큼의 공간만 있으면 되는 것을 크게, 높게만 지으려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 옛 한옥의 모습.

전통공예관에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도 볼 수 있고, 전통공예 시연과 전통놀이 체험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주말 이른 아침임에도 사람들이 많았는데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었다. 마침 전통혼례가 열리고 있었는데, 외국인 신랑과 한국인 신부의 혼례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쉴 새 없이 우리나라의 아름답고 고풍스런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모습에서 쇼핑센타에서는 볼 수 없는 들뜬 여행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옥마을 뒤편에는 1994년에 매설한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이 있다. 보신각 종 모형의 타임캡슐 안에는 서울의 도시모습, 시민생활과 사회문화를 대표하는 각종 문물 600점을 수장해서 현 시대의 사회상이 400년 후인 2394년 후손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그것을 열어보는 후손들의 표정은 어떨까? 그 때의 대한민국은 또 어떤 모습일지 걱정도 되고 흥분되기도 한다. 후손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오늘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잘 살아서 좋은 역사를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 정갈하고 간소한 한옥방

  지난 3월부터 이어온 서울성곽 답사 중 마지막으로 남산구간을 답사했다. 서울성곽은 1396(태조 5)에 쌓아서 만든 것인데 세종, 숙종 때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른다. 각 시기마다 달리 쌓은 성벽은 그것을 만든 방법과 돌 모양도 각각 달라 시대 변화에 따른 기술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한 것은 태조 때의 도성이고, 아래에는 큰 돌을 위에는 작은 돌을 쌓은 모양은 1422년 세종 4년 때의 도성이다. 1704년 숙종 30년 때의 도성은 정사각형으로 다듬어 벽돌 쌓듯이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쌓아 올려 한눈에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성벽과 성문은 훼손되고 겨우 일부만 남았으나 해방이후 현재까지 제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 서울성곽

  성벽에서 도성축성 실명제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전국에 무려 118,000여명이 동원된 도성축성에서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총 97지구로 나누어 책임시공을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돌에 새긴 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넷 등에서 익명성 때문에 많은 사회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요즘. 600년 전 선조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을 보며 자기의 이름을 걸고 책임을 지고자 했던 모습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

▲ 축성 책임자와 날짜를 새긴 성돌.

  2010년 새로 지은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우리나라의 독립뿐아니라 동양의 평화까지도 생각했던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를 만났다. 안중근 의사는 구한말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참담한 종말을 맞고 있을 때 불타는 애국심으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민족의 영웅이다. 안중근 의사 가문은 동생, 조카 등 항일 독립운동의 공로로 15명이 서훈을 받은 그야말로 항일독립운동의 명가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으나 일본의 통감정치가 시작되고 군대해산, 산림광산철도권을 빼앗는 등 일제의 식민지화가 노골화되자 "교육으로 백년대계는 가능하나 당장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며 무장투쟁으로 변신하게 된다. 의병투쟁을 하면서 일본군 포로를 만국공법에 의해 석방하는 등 평화사상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다. 이후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여조국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왼손 약지의 첫 관절을 잘라 그 피로 독립만세 글씨를 써 의병 제기를 다짐한다.

마침내 19091026. 아시아 침략 전쟁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의 총을 쏘아 처단한다. 이토의 죽음은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국내외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은 환호의 찬사를 보냈고, 중국의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 쑨원 등 지도자들은 안중근 의사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송축하였다.

옥중에서도 선생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자서전 안응칠역사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담아 국민을 일깨우고 못다 이룬 독립운동을 이어가게 하고자 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 안중근에게 "옳은 일을 하였으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니라."라고 전함으로써 부모보다 먼저 삶을 마감해야 하는 안 의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어머니. 그렇게 훌륭한 어머니가 계셨기에 우리는 오늘 안중근이라는 위대한 영웅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유언으로 "나의 거사는 오직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바라건대 이 자리에 있는 일본인들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이루는 데 힘쓰기를 기원하오."라고 말하고 의연하게 교수대에 올랐다. 32세의 짧은 삶을 오로지 민족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살아온 민족의 영웅은 어머니가 보내준 흰 한복을 입고 생을 마감하였다.

▲ 단지동맹을 맺은 안중근과 11명 동지들이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피로 '대한독립'이라 썼다.

안의사의 유해는 가족에게 인도될 경우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일제가 비밀리에 안장하였다. 안의사 순국 10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음에 안타깝고 원통하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자취를 따라가다보면 그 분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게 된다. 분노는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운동가들은 분노만이 아닌,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있었기에 암흑같은 항쟁기를 조국을 위해 온 몸을 바칠 수 있었고, 동양평화를 생각할 수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홍익정신이 아닌가 싶다. 나 하나 잘 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조국을 생각했고, 조국의 독립뿐 아니라 나아가 인류의 평화까지도 생각한 안중근 의사. 우리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홍익정신을 확인하고 지금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홍익활동을 다짐하며 뜻깊은 답사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