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왕으로 정해진 왕자. 겉보기에는 좋을 것같지만 실상을 보면 위태한 자리였다. 조선의 세자는 왕의 후계자로서, 다음 왕위에 오를 미래 권력의 상징이었다. 동시에 그는 또한 현재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세자는 예정된 순서에 따라 왕이 되거나 변수가 생기면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그 변수를 가져오는 존재가 아버지인 부왕일 때도 있었고, 세자 그 자신일 때도 있었다. 또 정변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조선에는 모두 스물일곱 명의 왕이 있었고, 스물아홉 명의 세자가 있었다. 현왕의 적장자가 세자로 책봉된 뒤 왕위에 오르는 것이 조선 왕실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실제 왕의 적장자로 세자가 된 뒤 왕위에 오른 이는 불과 일곱 명ㅡ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뿐이었다. 왕비가 왕자를 낳지 못해 그렇기도 했지만, 적장자가 왕위에 오를 만한 적합한 인물인가를 놓고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권력 집단 간의 갈등도 중요한 변수였다. 적장자,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를 말한다. 세자가 되는 조건은 적장자여야 했다. 왕과 왕비 사이에 태어난 적자 가운데 장자,  맏아들이어야 했다.  

하지만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도 세자로 책봉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장자든 아니든 세자에 책봉이 된 뒤에도 세자로 무사히 살아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형제들과 정적이 되는 것은 물론 때로는 부왕의 뜻에 어긋나 목숨을 잃었다. 세자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와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되 그것이 어디까지나 왕 다음이며 결코 왕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했다. 살아 있는 권력인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조선의 정치 운영 시스템에서 세자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역할은 제한되었다.

또한  세자의 책봉과 즉위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은 정치 권력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과 대왕대비 외에도 권력을 가진 신하들이 언제나 세자를 주시했고, 격변하는 정국 속에서 왕위에 오르기는커녕 목숨까지 잃기도 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세자빈을 맞이하고, 왕위에 올라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다가 평화롭게 생을 마치는 것은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오히려 드문 일이었다. 따라서 세자를 이해하는 것은 조선 왕실의 기본 시스템을 이해하고, 조선 왕실의 치열한 이면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조선의 정치사를 제대로 보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돌베개출판사가 펴낸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는 세자를 통해서 조선 왕실과 정치사를 톱아본다. 이 책은 조선 왕실에서 차지하는 세자의 위상에서 시작하여 세자의 궁중생활과 교육 과정, 주목할 만한 세자의 일생을 소개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이어 세자의 일상사에 돋보기를 들이밀듯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조선 왕실의 다양한 정치 상황을 세자를 중심으로 살핀다.

견제 받는 미래 권력

 우선 제1부와 2부는 세자가 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통과의례와 교육,  관례, 가례를 자세히 설명한다. 예를 중시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세자의 통과의례는 국가 행사였다.  제1부 ‘탄생, 책봉 그리고 교육’과 제2부 ‘세자의 혼례’에서는 왕의 아들이 태어나 책봉을 받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들이 거쳐야 했던 중요한 통과의례인 책례(책봉의식), 입학례(세자의 성균관 입학의식), 관례(유교식 성인식), 그리고 가례(혼례식)의 과정과 의미 등을 자세히 설명한다. 어린 나이에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으니 세자되기가 힘들었다.

세자가 되면 왕이 주관하는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고, 중국의 사신 영접과 관련된 의식, 종묘와 사직 등 국가 제사가 있을 때도 왕을 보좌하여 참석했다. 이런 의례들에서 세자의 위상은 모든 관료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왕의 보좌를 넘어, 세자 스스로 주관하는 의례는 확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세자가 어떻게 등장하고, 그가 주관하는 행사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조선 초기의 『국조오례의』, 조선 후기의 『국조속오례의』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세자의 하루는 공부의 연속이었다. 최고의 국왕이 되기 위해 하루종일 공부하다 세자의 일상은  단순했다.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도 거의 없었고, 심지어 거처를 함부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왕과 왕비 등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미래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다. 책봉 직후 성균관 입학례를 거행한 뒤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로 구성된 세자시강원 관료들의 지도 아래 강의 방식은 크게 법강(法講)과 회강(會講)으로 구분했다. 정규 강의인 법강은 아침 공부인 조강(朝講, 해뜰 무렵), 낮 공부인 주강(晝講, 정오 무렵), 저녁 공부인 석강(夕講, 오후 2시경)으로 계속 이어졌다. 회강은 한 달에 두세 차례 진행되는데 세자가 그동안 배운 경서와 역사서를 복습하고 평가하는 일종의 공개강의였다. 이뿐만 아니라 말 타기, 활쏘기 등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 <사진=돌베개출판사>

 그럼 세자는 언제 쉴 수 있었을까. 세자에게도 휴강일이 있었다. 이전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신 날, 왕의 생일, 그리고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날도 강의를 쉬고, 기우제를 치르거나 종묘와 사직의 큰 제사가 있는 날 등 국가적인 대사가 있는 날에도 강의를 쉬었다. 이렇게 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제왕학 수업을 받으면서 단련되었다. 이는 최고의 국왕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임과 동시에 왕위를 세습하는 왕조 사회에서 자질이 부족한 왕이 등극하거나 왕이 된 후 국정을 농단할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했다.

세자의 혼인을 보자. 이 또한 왕권과 관련이 있었기에 매우 중요했다. 물론 세자의 뜻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왕비를 놓아두고 후궁을 더 총애하는 일이 생겨,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세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면 세자빈을 맞아야 했다. 세자가 되었다고 해서 왕위에 오르는 것이 보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치를 확고히 하려면 후계자의 생산도 이루어져야 하고, 세자의 정치적 배경이 되어줄 세력의 확보도 필요했다. 어떤 집안의 딸을 세자빈으로 들이느냐는 왕실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딸을 세자빈으로 보낸 집안은 그 순간부터 세자가 왕이 되는 데 모든 것을 집중해야 했다. 자칫하면 집안이 멸문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반가들은 오히려 왕실과 사돈이 되는 자리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권력에 가까이 가는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권력에 가까워지는 만큼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왕실에서는 세자빈을 맞은 뒤 잘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세자의 위치와 역할을 가르치기는 하되, 세자는 어디까지나 왕 다음이며 결코 왕을 넘을 수도, 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이었다.

 세자가 되면 대리청정을 함으로써 정치수업을 받기도 한다. 또 능력을 시험받는 자리이기도 하였으니 여기서 눈밖에 나면 왕위에 오르지 못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것은 모두 일곱 차례였다. 문종, 예종, 광해군, 경종, 사도세자, 정조, 효명세자가 그들이다. 13세부터 30세까지 시작하는 나이도 달랐고, 청정의 기간 역시 1년부터 13년까지 다양했다. 대리청정의 목적도 달랐으며, 대리청정을 한 뒤 세자의 운명 역시 각각이었다.

 종과 예종은 장성한 세자에게 국정 운영의 능력을 높여주려는 세종과 세조의 뜻에 따른 대리청정이었다.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는 복잡한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한 영조와 순조의 정치적 목적으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경우는 임진왜란의 피난 과정에서 갑자기 세자로 책봉된 뒤 분조(分朝)의 형태로 국정에 관여하였다. 경종과 정조의 경우는 각각 폐사된 희빈 장씨의 아들, 폐위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불안한 세자(세손)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려는 숙종과 영조의 의도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중 세상을 떠나 왕으로 즉위하지 못했다. 왕위에 오른 세자들의 재위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문종은 2년 3개월, 예종은 1년 2개월, 경종은 4년 2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고, 광해군은 비록 13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정조가 유일하게 정상적인 왕위를 지켰는데, 정작 그의 대리청정 기간은 약 3개월 정도로 그의 선정이 대리청정의 효과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제3부 ‘세자의 대리청정’과 제4부 ‘왕이 되지 못한 세자’, 제6부 ‘세자와 형제들’에서는 대리청정을 했던 세자들, 세자로 책봉은 되었으나 정작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던 세자들, 그리고 그들의 형제자매를 둘러싸고 조선 왕실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이면에는 어떤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었는지가 소상하게 펼쳐진다.

 태종과 광해군은 왕위를 위해 형제를 죽였다. 태종의 남자 형제 여덟 명 중 동복의 형제는 여섯으로, 모두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었다. 여기에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이복의 형제가 둘이 있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소생 중 둘째 아들인 방석을 조선 최초의 세자로 세웠다. 방석은 서자이고 차남이었었다. 조선은 처음부터 적장자를 세자로 세우지 못했다. 이는 왕자의 난으로 이어졌다.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방원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이복형제 둘을 모두 제거한 뒤 결국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서자 출신이었다. 총명하고 효심이 깊었던 광해군은 주위의 신망을 받으며 자랐으나 순탄하게 세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것을 주저한 선조는 임진왜란 중 신료들의 성화에 못 이겨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고, 임진왜란 중 군사와 백성의 신망을 얻은 광해군에게 열등감과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 선조가 다시 왕비를 얻어 아들을 얻게 되자 광해군의 위기의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위기의식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동복의 형(임해군)과 이복동생(영창대군)을 유배 보냈고, 이들 모두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양녕대군 태종의 원자이자 첫 번째 세자인 양녕대군은 약 17년 동안 세자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학문을 게을리하고 사냥과 주색을 즐겼던 그는 제왕이 되기에는 부적합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그의 파행적 행실은 세자 교체라는 파국을 불러왔다. 양녕대군의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된 이는 훗날의 세종, 충녕대군이었다. 역사는 양녕대군을 가리켜 스스로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고 하나, 이것이 과연 자의이기만 했는지는 좀더 살펴볼 일이다.

 인조의 아들로,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는 서른네 살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에는 아들을 정적으로 여긴 아버지 인조가 관련되어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비극은 그에게서 그치지 않았다. 세자빈 강씨 역시 인조와 불화를 겪다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났고, 세 아들 모두 귀양지에서 죽거나 고초를 겪어야 했다. 영조의 아들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늦은 나이에 본 아들을 몹시 총애하고, 대리청정까지 시켰던 영조는 끝내 아들을 죽인 아버지라는 역사의 멍에를 져야 했다. 그러나 세자빈과 아들들까지 고초를 겪었던 소현세자와는 달리 사도세자는 훗날 아들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 명예를 복원하기도 했다.

 광해군의 아들로 세자에 책봉된 이지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함께 세자에서 폐위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감금생활을 견디지 못한 어느날 밤중에 빠져나갔다가 나졸에게 붙잡혀 폐세자빈은 자결하고, 본인은 사사되었다.

 궁궐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늘 긴장하여 살아야 했던 세자들의 내면은 어떠했을까. 그 한 자락을 엿볼 문학작품을 다룬다. 제5부 ‘세자의 삶, 그리고 한시’에서 소개된 사도세자와 효명세자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는 조선의 세자가 어떻게 책봉이 되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왕권과 신권이 공존했던 조선의 정치 시스템 안에서 실제 세자의 역할과 권한은 어디까지였는지를 살폈다. 동시에 권력을 둘러싸고 험난한 정치의 격변을 겪어야 했던 숱한 세자들의 삶을 돌아본다.  세자에 관한 개별 사실의 나열이 아닌 ‘조선의 세자’를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 안에서 정치와 엮여 실제 살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냄으로써, 그들의 존재가 조선 왕조와 왕실의 500년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좀더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앞서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를 함께 펴낸 저자들은 세자의 일상사와 조선 정치사에서 그들이 가진 의미를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구성에 신경을 쓰고, 흥미로운 책이 될 수 있도록 다채로운 이미지와 관련 사진들을 배치하는 데도 각별하게 공을 들였다. 세자의 일상은 물론, 왕실 안에서의 그들의 위상, 권력의 핵심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오히려 격변의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의 많은 세자에 관해 촘촘하게 서술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파편의 사실이 아닌 입체적이고 생생한 '조선의 세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오늘 우리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