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지금의 알카에다와 다름없는 악랄한 테러조직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민간인의 희생도 불사하는 잔인한 테러를 자행한 사람이다”
-뉴라이트전국연합

“서구적인 정치용어를 쓰자면 테러리즘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도 요즘의 미국에서라면 ‘테러리즘’으로 불릴 행동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29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이봉창․윤봉길 의거 8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 김영범 대구대학교 교수
김영범 대구대 교수는 ‘의열투쟁의 의미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조망’이라는 주제에서 “박노자나 뉴라이트 진영의 언술 속에서 ‘테러’나 ‘테러리즘’은, 2001년의 ‘9.11 테러’ 이후로 절대적 부정과 타매 대상으로 전락한 테러리즘의 논법 속에서 그들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테러는 의열을 절대 품어내지 못한다. 이 점을 외면하고 한국적 의열투쟁을 테러리즘이라는 개념틀 속으로 마구 쑤셔 넣고 동일시하려고만 드는 것은 그 자체로 무도한 폭력이거니와, 테러리즘 개념조차 제대로 파악․이해하지 못한 것이다”고 비판했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의열투쟁이 테러와 다른 점으로 백범 김구의 증언을 발표했다.

김 관장은 ‘윤봉길의사 현양 자료를 통해 본 상해의거의 역사적 의미’에서 “백범 김구가 윤봉길에게 적은 왜놈뿐이니 결코 왜놈 이외의 각국 인사에게 해를 가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라고 말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1932년 12월 1일 윤봉길 순국 18일을 앞둔 날 출판된 『도왜실기屠倭實記』에는 김구가 윤봉길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실렸다.

“최후로 군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적은 왜놈뿐이니 오늘 이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신중히 해야 할 것이고 결코 왜놈 이외의 각국 인사에게 해를 가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또한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백범 김구와 한인애국단’에서 “의열투쟁이 외형적으로 폭탄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테러와 같이 보이지만, 의열투쟁은 테러와는 엄연하게 다르다.”라고 말했다.

의열투쟁은 타격할 대상을 분명하게 정하지만, 테러는 명확한 대상이 없고 불특정한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 또한 의열투쟁은 의거 후 자신의 행위를 떳떳하게 밝히지만, 테러는 자신의 행위를 숨긴다는 점에서도 의열투쟁과 테러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타격대상이 일왕이었다. 일왕의 행렬을 보기 위해 많은 군중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폭탄을 던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뉴욕에서 비행기로 쌍둥이 빌딩을 공격한 것은 분명한 대상이 없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은 29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이봉창․윤봉길 의거 8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사진은 종합토론하는 모습.

일본 교과서에 ‘윤봉길’은 없다, 왜?

“일본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본사, 세계사를 모두 합쳐보아도 윤봉길을 다룬 교과서는 한 권도 없다.”

▲ 다무라 미쓰아키 전 호쿠리구대학 교수
이날 심포지엄에 참석한 다무라 미쓰아키(田村光彰)전 호쿠리구(北陸)대학 교수는 안중근은 일본사에서 총 18종류 중에서 17종류, 세계사에서는 총 11종류 중 6종류에서 다루어진 반면, 윤봉길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다무라 전 교수는 그 차이에 대해 안중근과 윤봉길이 저격한 사람의 ‘중요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1919년에는 전 통감 이토 히로부미(당시 추밀원 의장)가 하얼빈 역 근처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자 안중근에게 살해되었다”
(『일본사B』짓쿄(實敎),1998년, 275쪽)

그는 “안중근은 분명 다루고는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인물에 불가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교육하기 위해 서술되는 것뿐이다”며 “윤봉길이 사살한 사람들은 이토 히로부미에 비해 역사상의 중요도가 매우 낮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일본 교과서는 윤봉길뿐만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언급도 매우 낮다. ‘상해임시정부’는 일본사에서 한 종류이고, 표기를 바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사, 세계사에서 각각 한 교과서에서 밖에 다루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다무라 전 교수는 “일본사회에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침략과 전쟁책임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이라며 “그 최대 원인은 천황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사죄하지 않고 전쟁 책임을 지지 않았던 점에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윤봉길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로, 독일 히틀러 암살을 기도한 게오르그 엘저가 주목된다.

1939년 11월 8일 나치당이 뮌헨의 맥주공장(뷰르가브로이케라)에서 1923년 그들이 일으켰던 ‘뮌헨봉기’를 기념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당시 가구직공이었던 그는 히틀러의 연설시간에 맞춰서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그러나 그때 히틀러는 연설을 13분가량 빨리 끝냈고 나치당 고위당원과 함께 회장을 떠나고 없었다. 시한폭탄은 1초도 어긋나지 않게 계획대로 폭파되었다. 집회에 있던 7명의 나이든 전사와 웨이트레스 한 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60명에 이르렀다.

엘저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의 영향은 매우 컸다. 베를린에 있는 나라와 베를린시 정부가 설립한 ‘독일저항기념관’(24)에서는 엘저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전쟁을 저지하려고 했던 엘저상을 테러리스트가 아닌 저항자로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엘저의 이름을 딴 도로, 공원, 광장은 48개가 있으며, 엘저 이름을 붙인 학교가 베를린에 3개교나 된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용기 있는 저항 운동을 실행하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다무라 전 교수는 “일본의 교과서가 윤봉길을 무시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라며 “엘저의 행위가 레지스탕스, 저항투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바와 같이 윤봉길의 독립을 향한 행동도 그와 마찬가지로 칭송되어 마땅하다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봉창 의거, 중국인들의 인식을 바꿔놓다!

이봉창 의사의 일황저격사건은 중국인들이 한국독립운동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 손과지 중국 복단대학 교수
손과지(孫科志) 중국 복단대학(復旦大學) 교수는 ‘중국에서의 이봉창의거의 반향’이라는 주제로 “이봉창의 일황저격사건 이후 중국 각지의 신문들은 즉각 일본침략의 기세를 꺾은 이 사건을 보도하였고, 이는 중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중국인들은 이 소식을 접한 뒤 ‘기뻐 춤을 추고, 대한독립의 전도를 경축하며, 삼한의 용사가 숙원을 이루었음을 축하하였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잡지들은 이봉창의 일황저격사건을 보도하며 평론들을 함께 발표하였다. 그들은 이봉창 의거를 높이 평가하며 이봉창이 사형에 처해진 것에 대해 애도와 애통함을 표시하였다.

손과지 교수는 “이러한 보도로 인해 이봉창 의거가 한국의 지사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분투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봉창 의거 이후 중국 각계에서는 재중 한인독립운동세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직후 상해에서 1・28사변이 일어나자, 한중 양국 지사들은 서로 연합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할 것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이것으로 한중 양국민이 함께 일본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견실한 기초가 세워졌다. 국민정부 역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정책을 수정하고, 각종 방식을 통해 재중 한인독립운동세력을 지지하고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해 투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봉창․윤봉길은 공무집행 중 ‘순국’했다!

이봉창과 윤봉길, 두 의사의 거사에 대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기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 김도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이봉창의 동경의거는 지금까지 김구를 단장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봉창 의거는 김구 개인의 의열투쟁이 아니라 국가기관의 명령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이봉창이 일본에서 거사를 준비하는 동안 김구는 국무회의를 열고 의거에 대한 의결을 비밀리에 받았다. 이봉창의 의거는 임시정부의 공식기관인 국무회의의 의결을 걸쳤고 국가의 공적기구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즉, 이봉창․윤봉길 두 의거는 정부의 공식기관인 한인애국단의 명령을 받은 단원들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고 공무를 수행하다가 ‘순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