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내가 아니라 내 것입니다. 이것은 활구(活口)입니다. 활구란 수행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을 나타낸 문구입니다. 내 몸이 내 것이라는 것은 내가 내 몸을 볼 수 있을 때, 내가 내 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알게 됩니다.
  정신은 몸 안에서만 놀지만 이것이 몸 밖에서는 우주적으로 놉니다. 그 상태가 되면 유체이탈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체이탈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유체이탈을 했다고 내가 나를 보았다고 그것으로 끝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내 몸이 내가 아니고 내 것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우주가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몸이 나였을 때는 내 몸으로서만 있는 것이 나였는데, 정신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신이란 것은 펴면 우주를 덮을 만큼 크고, 오므리면 바늘 끝 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형태가 없습니다. 마음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마음은 늙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몸의 변화가 온다는 것뿐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 늙는 것입니다. 마음은 늙지 않습니다. 마음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차원이 달라집니다.
  몸에서 마음의 차원으로 세계인의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 몸을 나로 알 때는 정치인도, 종교인도 몸에서 못 벗어납니다. 모든 사람이 내 몸이 나라는 차원에서의 내가 아니고 내 것이라는 차원의 내가 되면, 너와 나는 하나이니 구분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자유롭기 위해서도 스스로를 풀어야 합니다. 마음이 자유로우면 흑백 문제도 국가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원래는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되지 않고는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안 됩니다. 인류의 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지상에 천국을 실현하기 위해서 종교가 나왔고 철학이 나왔습니다. 인류 평화를 위해서 과학과 문화가 창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는 개념만 바꿔버리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데 있습니다. 너와 내가 하나라는 감각만 회복이 되면 원래가 하나이니 최소한 이기주의는 이타주의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인류가 가는 길은 열심히 정직하게 살게 되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게끔 컴퓨터 회로가 되어 있습니다. 너와 내가 다른 차원에서는 정직하고 열심히 사는 것은 남이 나를 해치면 보복해야 하는 것이고, 남보다 내가 잘 살아야 하는 것이며,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인류사회를 파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선진국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배울수록 이기적이 됩니다. 양보는 없습니다. 양보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훌륭하게 보이는 정도까지 되어버렸습니다.
  정당하고 바르게 살도록 가르치기보다 먼저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열어주는 것이 현대 성인이, 깨달은 자가, 그리고 교육자가 할 일입니다. 지금 교육은 자기만 알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기심만 키우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육이 민족이 화합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화합할 수 없고 분열될 수밖에 없도록 하면서 화합과 통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정신 속에서는 화합과 통일, 인류평화는 영원히 있을 수 없습니다.
  정신개벽이 크게 일어나야 합니다. 물질개벽은 일어났습니다. 이대로 나가면 인류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왔습니다. 완벽하게 멸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 방이면 지구가 여지없이 박살나버립니다. 멸망하게 되는 것도 인간의 정신이요, 인류의 대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것도 인간의 정신입니다. 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내 몸이 내가 아니고 내 것이라는 차원은 내 몸이 나라는 존재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고, 몸은 내 정신이 잠깐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것으로 내 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다 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몸속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몸속에만 갇혀 사는 것이 아니고 욕망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욕망은 모셔야 되는 대상이 아니고 즐겨야 되는 대상입니다. 몸도 모셔야 되는 입장이 아니고 써야 되는 입장인 것입니다. 몸을 모시는 것은 자동차를 사서 폐차 처분할 때까지 타지 않고 매일 닦아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가 시간이 가면 안 써도 녹이 쓸듯이 몸뚱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 모셔도 녹 쓸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몸뚱이를 위하려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써야 하고 욕망도 써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과 몸은 이상적인 가치관을 위해서 태워져야 합니다. 결국은 죽어 없어질 몸인데 바짝 태워야 죽을 때 고생을 안 합니다. 제대로 타지 못하면 타다 만 장작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잘 버는 사람보다 돈을 잘 쓰는 사람을 더 멋지게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는 것보다 가르칠 때 더 큰 환희심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은 나의 욕심으로 하지만 전달할 때는 천지마음(天地心)으로 하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오직 내가 천국에 가고, 내가 성불하고, 내가 극락에 가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내가 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공부를 하다 조금 환희심을 느끼면 사람들은 그것으로 큰 공부가 된 것인 양 합니다. 이 공부는 한 달을 배웠으면 한 달을 가르쳐야 하는 공부입니다. 방법을 가르치고 기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정신을 가르쳐야 됩니다. 그 정신이 천지인(天地人)정신입니다. 우리 민족의 정신이 종교와 사상을 초월한 정신이라는 것을 세계에 알려야 합니다.
  천지인 정신은 하늘사람 정신입니다. 그리스도 정신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정신입니다. 이 공부를 하다 보면 ‘내’가 보입니다. 그것이 각(覺)입니다. 천지기운(天地氣運)을 깨달은 것입니다. 기적 현상은 시작일 뿐이고 각(覺)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각(覺)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기운과 내 기운이 한 기운이고, 지구가 도는 기운이나 잠자리가 날아가는 기운이 다 한 기운이라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단학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상식으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특정 성인만 깨달아서는 아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상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단학은 3차원 교육이면서 4차원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수련을 통해 가정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민족이 바뀌고 나아가 인류가 바뀌는 것이 단학의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