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누각에는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임진왜란의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진주 촉석루(矗石樓),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인 평양의 부벽루(浮碧樓)가 있다.  그중 영남루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영남루와 마주하는 천진궁은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단군 이래 8왕조 시조(始祖)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유명하다. 중앙 수좌(首座)에는 47분 단군 중 첫째인 단군왕검의 위패를 봉안하고 동벽(東壁)에는 부여, 고구려, 가락의 시조 왕, 고려 태조왕을 모시고 있으며, 서벽(西壁)에는 신라, 백제, 발해고왕, 조선 태조의 위패를 차례로 봉안하고 있다.

천진궁은 원래 조선 현종6년(1665년)에 밀양부사 홍성구(洪聖龜)가 창건한 요선관(邀仙館)이었다. 현재 건물은 헌종10년(1844)에 부사 이인재가 국혼(國魂)을 살리기 위해 크게 보수한 것이다. 광복 후 지역 유지들의 뜻을 모아 발족한 단군 봉안회가 1956년부터 단군 봉안전으로 사용하면서 매년 음력 3월 15일 어천대제(御天大祭) 10월3일 개천대제(開天大祭)를 밀양시장이 직접 초헌관으로 참석하여 엄숙히 올리고 있다.

천진궁은 나라의 길흉사를 예진하는 사명대사비석(땀나는 비석)과 밀양의 정신을 대변하는 아랑의 전설이 담긴 밀양아리랑과 함께 밀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창경궁을 벚꽃과 동물들을 키우는 동물원으로 바꾸어 우리의 정신을 침탈했던 일제는 국조(國祖) 단군을 모신 천진궁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일본 헌병들에 의해 반만년을 자랑하는 한민족이 얼과 혼을 말살하기 위해  독립군을 가두는 옥사(獄舍)로 사용하기도 했다.

천진궁에 들어가는 문은 만덕문(萬德門)이다. 우리나라의 대표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중 ‘삼일신고’ 천훈에 “계만선 문만덕”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천진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천진궁의 의미는 우리말에 어린아이에게 “천진난만하다” “순진무구하다”라고 하는데 즉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늘의 정신을 가장 순수하고, 온전하게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성을 찾아서 인간사랑, 나라사랑, 지구사랑의 정신을 널리 펼쳐라”라는 한민족 천손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아주 경건한 곳이다. 지금도 경향 각지는 물론 일본 등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천진궁에 들어서면 가운데 국조 단군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천부경이 있고 왼쪽에는 무궁화를 수놓은 대한민국 지도와 ‘홍익인간이화세계’라고 쓴 액자가 있고 가운데는 고조선의 국기라고 할 수 있고, 정신을 상징하는 天地人= 원방각(ㅇㅁㅿ)이 있다.

밀양에서는 예로부터 정월 초나 집안의 길흉사가 있을 때 천진궁에 고했다. 특히 객지로 떠날 때 찾아 엄숙히 예를 올리고 “제가 고향을 떠납니다. 어디를 가던 홍익인간 정신을 잊지 않고 나와 민족과 인류를 위한 큰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을 했다. 또 시집장가를 갈 때도 찾아 하늘에 기도하며 본성을 잃지 않고 귀한 삶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이렇게 국조단군의 홍익정신이 대대로 내려오다 보니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안동과 더불어 독립기념관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종교 3대 교주 단애(檀崖) 윤세복과 그 집안에서 윤세용, 윤세주라는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석정 윤세주 열사는 조선의용대원으로 활동한  공을 인정받아 2011년 6월 천안 독립기념관에 어록비를 세웠다. 그의 고향 친구 약산 김원봉(임시정부 국방장관)은 의열단장으로 일본이 가장 무서워했던 독립운동의 선봉장이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독립의 선봉에 섰던 선열들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이 배출된 이유는 천진궁을 중심으로 남천 강을 굽어보는 밀양에 반만년의 역사와 국혼을 상징인 천부경, 홍익의 삼원철학이 면면히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