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국학원 광복의병연구소 주최로 지난 1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는 신흥무관학교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한·일 관계의 모색'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세 번째 발표자인 홍윤기 UBE 국학과 석좌교수(한일천손문화연구소 소장)는 '한ㆍ일 고대사의 올바른 인식'주제발표에서 일본 에도시대 국수주의자들인 '미도학파'에서 비롯된 황국사관과 19세기 메이지 유신이후 군국주의가 결합해 일본 고대역사 및 한일관계사를 부당하게 조작한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국보 '구다라관음(百濟觀音)'을 들었다. 홍 교수는 "구전된 명칭이나 호류지 고문서 및 연구를 통해 7세기 초 백제가 보낸 불상이라는 것이 명백함에도 일본은 불상의 재질인 녹나무를 문제 삼은 오바라 지로 교수의 발표에 힘입어 일본 자체 제작으로 해외홍보를 하고 '새로운 역사교과서'에 게재했다. 오바라 교수의 주장에 오류가 지적되어 학계의 비난을 받았음에도 눈을 감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메이지유신 당시부터 군국주의가 본격화되면서 고조선의 '단군개국사화'와 고구려, 가야의 개국사화를 가져다 일본 개국신화와 역사로 변조 모작하였음을 밝혔다. 홍 교수는 "우리가 상고시대 일본 땅에 공고하게 심었던 단군왕검의 천신 신앙에 대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한· 일관계사 정립의 기틀이 된다."고 했다.

<발표내용 전문>
한・일 고대사의 올바른 인식

머 리 말
1. 백제인 숨결 깃든 찬란한 백제‘구다라관음’
2. 이른바 ‘새로운 역사 교과서’ 등 잇단 역사 왜곡
3. 반한(反韓)의 기수, 국수주의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4. 한국어를 “북녘 오랑캐 말”로 비하한 반한(反韓) 언동
5. ‘단군’ 모시는 태양신 제사 의식 가져온 신라의 천일창 왕자
맺 음 말

머 리 말

동아시아의 참다운 평화를 위해서는 한중일 간의 올바른 역사 인식이 그 뿌리를 이루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특히 한일 간의 역사왜곡의 시정은 더욱 중요한 과제이다. 일본 고대 문화가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아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종래 일본 사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오늘날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처사로부터 한일 간의 이른바 ‘역사왜곡’ 마찰을 빚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한 실례를 들어본다.

1. 백제인 숨결 깃든 찬란한 백제 ‘구다라관음’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국보 불상은 ‘구다라관음(百濟觀音)’이다. 백제가 7세기 초에 나라(奈良) 땅 왜 왕실로 보내준 훌륭한 녹나무 불상이다. 흡사 늘씬한 여성처럼 쭉 뻗은 키 2m28cm의 입상. 현재 일본 나라 땅 ‘호류지’(法隆寺·607년 백제 건축가들이 세움) 경내의 ‘구다라관음당’ 안에 모셔 있으며,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백제 왕실이 왜 왕실로 이 불상을 보내주었을 때의 명칭은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이었다. 그런데 18세기경부터 본래의 명칭은 사라져버리고 이 사찰에서조차도 구다라관음, 즉 ‘백제관음’이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일본 각지에서 일인들이 나라 땅의 호류지를 찾아가는 것은 이 구다라관음을 보기 위해서다. 그만큼 일인들의 찬양을 받고 있는 것이 백제에서 건너간 구다라관음이다. 그러기에 일본의 저명 학자나 명사치고 옛날부터 이 불상에 대하여 글을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구다라관음은 백제의 불상 조각가가 한 둥치의 녹나무(樟木)로 만든 입상이다. 녹나무란 좀약을 만드는 방충제의 원료가 되는 목재인 만큼 벌레가 먹거나 쉽사리 썩지 않는다. 백제인이 슬기롭게 만든 이 녹나무 불상은 장장 1300여년을 왜나라 터전에서 줄기차게 버티고 있다.

허공장보살이라는 이름이 구다라관음으로 바뀐 것은 어떤 까닭에서일까. 이 녹나무 불상은 구다라의 빼어난 불교 미술품이기에 저마다 “구다라에서 건너온 훌륭한 관음불상이다”라는 계속되는 찬사 속에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백제 것만이 최고다”라는 “구다라나이”의 대명사가 되고만 것 같다. 아무래도 구다라관음이라는 명칭 등장은 매우 자연스러운 구다라 찬양의 발자취라 할 수 있다.

교토대학 총장을 역임한 고고미술사학자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1881∼1938) 교수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이 불상의 ‘구다라’ 명칭에 관해 “이 불상을 ‘구다라관음’으로 부르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 ‘허공장보살’로 불려왔다고 하는 것은 이 불상의 아래쪽 대좌에 불상의 명칭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百濟觀音·1948)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하마다 교수는 일찍이 구다라관음이 허공장보살이란 명칭으로 백제로부터 건너온 것을 시인했다.

이 구다라관음이 백제에서 왔다고 하는 발자취는 필자가 지난날 발굴한 호류지 고문서인 ‘제당불체수량기 금당지내(諸堂佛體數量記 金堂之內)’에 “허공장보살은 백제국으로부터 도래하였다(虛空藏菩薩百濟國ヨリ渡來)”라고 쓰여 있는 데서 알아냈다. 저명한 역사 지리학자였던 요시다 도고(吉田東伍·1864∼1918) 박사가 저술한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1900)에서도 “허공장보살을 가리켜서 구다라관음으로 부르게 된 것은 백제국에서 보내준 목상관음상(木像觀音像)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지난 1971년, 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문이 나타나서 일본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녹나무로 만든 불상 ‘구다라관음’은 결코 ‘구다라(백제)’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고대 일본 특산 나무를 가지고 일본에서 만든 불상이다. 왜냐하면 조선에는 녹나무가 자라나지 않기 때문이다. 녹나무는 일본, 대만 및 중국에서만 자생하며, 조선에는 분포하지 않는다.”(上代木彫の用材·1971)

이렇게 주장한 사람은 그 당시 일본 지바(千葉)대학의 목재학 담당 오바라 지로(小原二郞) 교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하루아침에 일부 일인들의 환호성을 올리게 했다. 그런가 하면 도쿄교육대학의 미술사학자 마치다 고이치(町田甲一) 교수가 일본 NHK방송(교양프로 ‘문화전망’·1989)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방송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본인이 찬양해 왔던 자랑스러운 국보 구다라관음은 구다라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내온 구다라 불상이 아닙니다. 이 녹나무 구다라관음이야말로 고대에 일본인이 일본에서 만든 불상입니다. 왜냐하면 한국 땅에서는 녹나무가 자라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목재 전문학자 오바라 교수에 의해서 명백하게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재학자 오바라 교수의 돌출적인 연구 논문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발표되고, 일본의 이름난 미술사학자가 잇달아 방송을 통해 이를 알리자, 하루아침에 백제 구다라관음의 자랑스러운 백제 불교미술품의 명성은 실추되기 시작했다. 과연 한국에서는 녹나무가 자생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때마침 그 방송을 청취한 녹나무 장뇌사(樟腦史) 전문가인 야마모토 렌조(山本鍊造)라는 학자가 이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다음처럼 일축했다.

“현재도 한국에는 녹나무가 엄연히 자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300년 전에 녹나무가 한국에 없었다고 하는 적극적인 증거가 없다면 한국에 녹나무가 자생하지 않았다고 감히 누구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大和古寺巡歷·1989)

2.  이른바 ‘새로운 역사 교과서’ 등 잇단 역사왜곡

결국 목재학자와 미술사가는 야마모토가 녹나무의 한국 자생을 규명함으로써 학문적으로 각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구다라관음은 그 이후 다시금 일본 문화재 관계 당국자들에 의해 잇달아 수모를 당했다. 지난 1997년 9월 10일부터 2주일간 구다라관음이 프랑스에 나들이하여 파리 루브르박물관 ‘드농관’에 특별 전시돼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그 당시 구다라관음은 프랑스 정부가 제정한 ‘일본의 해’ 기념으로 일본 나라 땅 호류지로부터 파리로 공수되었다. 막대한 보험료가 달렸다는 이 백제 불상에 관한 전시실 ‘게시문’은 다음과 같았다.

“이 구다라관음은 한국(구다라)으로부터 건너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비슷한 양식의 목조불상이 그 당시 중국이나 한국의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의심할 나위 없이’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호류지 고문서에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옛날 문헌이 입증하고 있으나, 게시문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일본제임을 확신한다”고 거짓 주장한 것이다. 또한 2001년 6월에 간행되어 한일 간에 큰 말썽을 빚은 책이 대표 집필자 니시오 간지(西尾幹二)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였다. 이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백제관음상의 컬러 사진을 화보(3쪽)에 싣고, “구다라관음은 아스카 시대(592∼710)를 대표하는 우미한 불상이다. 녹나무는 조선에 자생하지 않으므로 구다라관음은 일본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이 교과서는 해마다 일부 학교가 채택하여 쓰고 있다.

한편 현재 호류지가 방문객에게 배포하고 있는 ‘호류지 약연기(略緣起)’라는 선전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참고삼아 그 머리글을 옮긴다.

“호류지에 전해지고 있는 백제관음상(아스카 시대)은 일본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불상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일본 불상으로서는 진기하게도 팔등신의 날씬한 모습과 우아한 자태와 자비로운 그 표정은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하략).”

이와 같은 글도 구다라관음의 발자취를 모르는 관람객에게는 백제에서 보내온 구다라 불상이라는 사실이 올바르게 전달되기 힘든 기술일 따름이다.

더구나 ‘구다라관음’을 일본 것으로 내세우는 역사 왜곡은 현재 일본의 한 포털사이트(www.google.co.jp)의 ‘역사판(歷史板) 퀴즈’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는 ‘백제관음’에 대한 질문에서 “1951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된 호류지 구다라관음상. 이 불상이 ‘구다라관음’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별도의 객관식 해답란에서 ‘구다라’로 호칭하는 까닭은 “후세 사람들의 착각(後世の人の勘違い) 때문”이란 답을 만들어서 제시하고 있다.

1971년 7월8일,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무령왕 머리맡에서 발견된 장식의 연화당초문은 백제관음의 보관(寶冠) 장식과 똑같다. 구다라관음이 백제에서 건너간 불교미술품이라는 증거다. 오늘날 호류지에 건재하는 구다라관음 이야말로 “백제 물건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전형적인 ‘구다라나이’의 표본 백제 문화재이다. 여기 한 가지 곁들여 밝혀 두자면 8·15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부가 일본에 요청했던 ‘한국문화재 반환 청구 제1호’가 백제관음이기도 했다.

3.  반한(反韓)의 기수, 국수주의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한일 고대사의 올바른 인식의 중대성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과연 언제부터 한국을 극렬하게 배격하는 일본의 역사왜곡이 빚어지게 된 것인가를 반드시 살펴볼 일이다. 그것은 지금부터 약 4백년 전 부터 본격화된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일본의 반한(反韓)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고조선 단군 상고사 말살을 하지 않고서는 아시아 극동 지역에서 도저히 일본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킬 수 없다고 하며 결집했다. 즉 그들 국수주의자들은 천황을 하늘의 천신의 직계 후손으로 조작하는 이른바‘황국신도’(皇國神道)라는 황당 무괴한 역사를 꾸며내기 시작했다. 일본이 한반도 삼국시대(신라, 백제, 고구려) 보다 6백년 더 앞서서 하늘의 천신의 아들들인 천황이 신의 국가(神國)을 세우게 되었다고 내세우면서 이른바‘기원(紀元) 2600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 국가’를 표방한 것이었다.

이른바 ‘미도학’(水戶學) 학파(學派, 安積澹泊, 栗山潛鋒, 藤田幽谷, 栗田寬 등등)가 앞장서서 ‘황국신도’역사를 새로히 날조하기 시작했고 여기 가세한 것은 근세의 대표적 국학자 가모 마부치(賀茂眞淵, 1697~1769)를 비롯하여 그의 애제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며 아라키다 히사오이(荒木田久老, 1746~1804), 히라다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 등등 수많은 황국사관(皇國史觀) 일본 역사 조작 작업 가담자들이었다.

이들로부터 비로소 신(神)의 아들로서의 절대자 천황의 지배와 그 황실 존숭(皇室尊崇)의 열렬한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이라는 국수주의 사상이 발생했고 동시에 단군 상고사를 배척하는 배외(排外)주의 황국사관이 일본 땅에서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져 갔다. 즉 앞에서 지적했듯이 일본의 역사를 그들은 이른바 ‘기원(紀元) 2600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 지배 신국 일본(神國日本)’이라고 내세우며 역사에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던 6백년간 이라는 새로운 초기 개국 천황시대를 만들어 갖다 붙였다.

여기서 말하는 기원(紀元)은 서력기원(西曆 A. D.)이 아닌 일본 중심의 황국 신도 건설 기원 년도이다. 이렇게 그들이 역사를 날조한 것은 그들이 단군의 후손이라는 그들 본래의 역사책(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단군 및 가야 천손 문화 역사를 은페시키기 위한 발악적인 처사였다. 이래서 이들이 만들기 시작한 황국신도 2600년의 새 역사책은 이른바 ‘대일본사(大日本史, 397권, 1657~1906 완간)’였다.

뒷날의 그 완성까지는 250년간의 기나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일본의 통치자를 사람이 아닌 인간신(人間神)으로서의 천황 중심의 절대 권력의 국가 체제를 정당화시키려던 황국신도라는 발상이었다. 이들은 천황의 절대화를 주장하였고, 이후 전제 지배와 해외 침략을 합리화시키고 긍정하는 주장을 그 바탕에다 깔았다.

4. 한국어를 “북녘 오랑캐 말”로 비하한 반한(反韓) 언동

특히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고사기’ 연구를 하면서 한국과 중국 등 외래 사상이며 유교를 철저하게 배척했다(直毘靈). 그는 신화시대며 고대로의 소위 복고(復古) 사상을 외치면서 고문서와 금석문 등 고고학적인 연구로 저명한 고증학자(考證學者) 토테이칸(藤貞幹, 1732~1797)의 저술을 격앙하여 능멸하며 일방적으로 배격 비판했다(鉗狂人).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반한적(反韓的)인 배타적 국수주의의 신봉으로 이른바 조작된 황국신도의 ‘고대정신’(古代精神)을 내세우면서 토테이칸에게 짐승을 묶는 ‘솨사슬을 목에 맨 미치광이’라고 야유하는 그런 끔찍한 제목의 책자인 이른바 '鉗狂人'을 써냈다. 그야말로 이성을 망각한 발광적인 작태였다.

이를테면 토테이칸이 여러 가지 고서의 고증 등 연구로서 일본어의 실체에 대하여 “우리 일본의 언어는 그 중 십중팔구가 상고 시대의 한국음과 한국어 또는 서녘의 음(音)에서 건너왔다”(本邦のは言語、十中八九は上古の韓音韓語、或は西土の音の轉ずるもの也)고 한국으로부터 일본어가 큰 영향을 받고 성립된 사실(事實)을 밝히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그의 연구에 대해 다음처럼 격노하며 국수적 황국 사상에 치우쳐 배격했다.

“황국언(皇國言, 그 당시 일본어를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른바 ‘황국언’이라고 최초로 일컬었음, 필자주)은 신대(神代) 초기로부터  비롯된 스스로의 황국언으로서 그 경사스러움도 묘하다. 또한 여러 가지 ‘북녘 오랑캐 한어’와는 함께 논할 수 조차 없다”(皇國言は神代の始より、おのづからの皇國言にして、其めでたく妙なる事、諸の戎狄言と、同日に論ずべきにあらず。鉗狂人). 이렇듯 그는 한국어를 무턱대고 능멸하며 ‘戎狄言’ 즉, ‘북녘 오랑캐 말’이라고 비하했다.

이것은 일본어의 뿌리가 된 상고시대 조선어에 대한 그의 극단적이 콤플렉스의 노정이다. 그의 이런 편향된 부정적 논술에 대하여는 뒷날 고를 달리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련다. 한결같이 ‘기원 2600년, 만세일계의 천황’을 표방한 이들 에도시대 배타적 황국신도가들은 조선의 삼국시대(신라 B.C. 58년 개국, 고구려 B.C. 37년 개국, 백제  B.C. 18년 개국 등) 역사보다 일본이 6백년이나 먼저 앞서서 나라를 세웠다고 거짓 주장하기 위해 역사를 변조한 것이 “신의 나라 일본(神國日本)은 B.C.660년에 신의 아들 진무(神武)천황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목청을 돋우웠다.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첫 진무(神武) 천황이 기원 2600년에 나라를 세우고 일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황국신도가 꾸며낸 진무천황(神武天皇)이라는 이름의 초대천황은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은 날조된 가공의 왕이었다(津田左右吉 古事記及日本書紀の新硏究 1924, 외 여러 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며 미도학파(水戶學派) 등 국학자들이 가장 크게 두려워한 것은 단군신화며 가야신화가 그들의 개국신화의 모태(母胎)라는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대일본사’는 처음부터 조선의 단군신화며 가야신화는 철저히 뿌리쳐 외면한 채, 그들의 개국신화인 천조대신과 그의 외손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 이하 니니기)가 천상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는 강림 신화(降臨神話) 만을 크게 떠받들었다. 거듭 밝혀두자면 일본 역사를 600년 위로 조작 연장시킨 내막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의 삼국시대(신라, 고구려, 백제 건국 등) 보다 일본이 월등히 600년이나 먼저 앞서서 국가를 세운 신도(神道) 국가라는 것을 내세우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이들의 처사에 대해서 도쿄대학 사학과 마에다 카즈요시(前田一良) 교수는 “미도학(水戶學) 이외 유학(儒學) 출신의 일부 사람들은 유학 이론을 앞세워 신국일본(神國日本)과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의 존엄성을 역설했을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유학의 비판자라고 하는 자세로 나타난 국학(國學)도 한 층 더 열렬하게 독특한 방법으로 그것을 역설했다.

그 까닭에 가모 마부치(賀茂眞淵)며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와 히라다 아쓰타네(平田篤胤) 등에 의하여 완성된 국학은 존왕론(尊王論)을 발전시키는 데 엄청난 힘이 되었고 마침내 그것은 뒷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7년부터 임, 필자주)을 실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간주되고 있듯이, 확실히 국학 사상이 끼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와 같은 힘을 갖게 되는 원동력으로서 형성되어 온 것인가. 거기에는 중요한 점이 두 가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이웃나라 학문에 대한 배척이며 이제 또 하나는 국학의 문헌학적 성격이다”(古代の理想化『日本の建國』1957)라고 집약적으로 지적했다.

5. ‘단군’ 모시는 태양신 제사의식 가져온 신라의 천일창 왕자

2차 대전 패전 후의 일본을 돌아보자면 가장 주목되는 학문적 성과가 일본의 대표적 민족학자였던 도쿄도립대학 교수 오카 마사오(岡正雄, 1898~1982) 박사의 다음 같은 연구 발표였다. “단군 신화를 보면 하늘에서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3종의 보기’(寶器)를 주어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했다.

그와 같은 조선 신화를 가져다 본 뜬 것이 다름 아닌 일본 신화의 ‘3종의 신기(神器)’였다.”고 단정했다.(日本民族文化の源流と日本國家の形成 1949). 뒤를 이어 일본에서는 민족학자 뿐 아니라 역사학자며 신화학자들도 줄지어 올바른 한일 관계사의 역사 이론을 내놓게 되었다.
일본 고대역사에 보면 신라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천일창(天日槍, 아메노히보코) 왕자가 최초로 일본에 ‘곰신단’(熊の神籬)을 가져감으로써 일본 왕실에는 비로소 일본의 신도(神道)가 개창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신궁(神宮)이 섰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 일본 제11대 스이닌천황(垂仁, BC. 29~AD.70) 3년 3월에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왜나라에 건너 왔다.”고 했다. 이 당시 천일창 왕자는 신라에서 ‘곰신단’(熊の神籬)과 옥(玉)이며 양날창과 청동거울 등 일곱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왔다.

옥(玉)이며 양날창과 청동거울이 천황가 삼신기(三神器)의 실체라는 오카 마사오 교수의 주장에 앞서 일찍이 도시샤대학 사학과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교수가 “곰신단은 고조선의 ‘태양신’(日神)을 모셔다 제사지내는 하늘의 제사 종교 의식(天的宗儀)”이라는 연구논문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즉 단군 신앙이 천일창 왕자에 의하여 일본 왕실로 전래된 것을 다음처럼 시사했다.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의 이름은 ‘태양신’(日神)을 모셔다 제사지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동탁(銅鐸, 종 모양으로 생긴 구리쇠의 왕실 제구祭具, 필자주) 내지 동검제사(銅劍祭祀, 왕실에서 ‘구리쇠 칼’을 제단에 모셔놓고 제사지내는 일, 필자주)로 상징되는 하늘의 제사 종교 의식(天的宗儀)을 신라에서 가지고 와서 활약한 것이다”(三品彰英論文集 第4卷, 1943).

좀더 구체적으로 ‘천적종의(天的宗儀)’를 풀어보면 그것은 상고시대 조선 민족이 곰신(熊神)을 받들며 신단에다 단군을 모시는 ‘천신제사의식(天神祭祀儀式)’이었다고 본다. 이 제사 의식에서는 제단에 제물과 함께 칼이며 동탁 등을 진설했다고 보련다. 천신 제사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하늘의 신을 해의 신(日神), 즉 태양신(太陽神)으로 상징해온 것을 의미한다고 보련다. 국수주의자들은 이세신궁의 단군 역사와 신앙 말살하면서 ‘천조대신’을 신주(神主)로 위작(僞作)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 건국 최초의 왕을 신무천황(神武)이라고 한다. 그러나 와세다대학 사학과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교수는 “초대 신무천황과 그 뒤를 이은 제9대 가이카천황(開化天皇,이하 개화천황) 까지 모두 9명의 천황은 일본 역사책에서 조작된 왕들이었다.”고 폭로 비판했다.(津田左右吉 古事記及日本書紀の新硏究 1924, 外). 그것은 당시 새롭고도 중대한 역사론의 전개였다.

일본의 국수적 황국 신도가들이 에도시대(1603~1867) 후기부터 일본 역사를 약 6백년 위로 더 만들어 연장 상향 날조했다는 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오키 고지로 (直木孝次郞 日本神話と古代國家 1993) 교수 등 양식 있는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의 통설이다.

일본 군국주의 치하에서 쓰다 소키치 교수의 그런 과감한 비판은 조선을 강점하고 만주와 중국 땅까지 침범하고 있던 당시 일제 군국주의자들을 크게 당황케 했다. 그들 관헌은 쓰다 소키치 교수를 강제 연행했고 또한 그의 주저서 4권을 서점가에서 즉시 압수 판매금지 처분시켰다. 그 뿐 아니라 쓰다 소키치 교수를 “일본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 죄로 금고 3개월의 유죄 판결했다.”(三省堂 人名辭典 1978).

사실상 일본을 건국한 최초의 왕으로 고찰되는 인물은 스진(崇神)천황이다. 그러나 황국신도가들이 조선 삼국시대의 개국시기보다 일본이 훨씬 더 앞섰다고 위장하느라 그들의 역사를 6백년이나 상향 조작 날조(ねずまさし 天皇家の歷史 1973)한 일 때문에 사실상의 초대 일본 왕이었다는 스진(崇神)천황의 정확한 지배 시기를 알 수 없다. ‘일본서기’에 보면 스진천황은 제10대 천황(BC.97~30)으로 매겨져 있고 스진천황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제3왕자 스이닌(垂仁)천황(BC. 29~AD.70)이다.

일본의 국수적 황국신도가들은 역사를 6백년이나 위쪽으로 추켜올리면서 일본 미에현(三重縣)에 있는 왕실 최고의 사당 이른바 국가 신도의 성전이라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을 ‘기원(紀元) 2600년 만세일계 천황가’의 천하 최고 성역(聖域)의 신궁(神宮)이라고 강조해왔다. 이는 단군 조선 역사와 신앙 말살책에서 비롯되었다. 즉 성지인 이세신궁이 본래 신라 천일창 왕자의 곰신단에 의하여 일본 최초의 신궁(神宮)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은폐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신도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신궁(神宮)’이라는  호칭조차 일본에서 최초로 발상된 것이 아니었다.

이세신궁을 세웠을 때 본래 이곳에 모신 신은 단군왕검을 신봉하던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그 터전이‘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주신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와 같이 역사를 뒤집은 것이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역사를 조작한 ‘황국신도(皇國神道) 2천6백년 만세일계의 천황’이라고 하는 역사 날조 당시의 처사였다. 그들은 일본 이세신궁의 단군 신앙을 말살하면서 천조대신을 신주라고 위작(僞作)했다. 대다수 일본인들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으나 그것은 너무도 큰 반역사(反歷史)의 죄악이다.

19세기 말엽,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주신은 본래 부여의 영고신(迎鼓神), 고구려 동명신(東明神), 예(濊)의 무천신(舞天神) 등등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고 천조대신을 주신으로 삼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神道は祭天の古俗 1891).

이 논문에 당황한 일본 군국주의자들(倉持治休 등)은 구메 구니다케 교수댁을 기습하여 일본도를 교수의 목에 들이대고 논문을 취소하라고 협박했다. 교수는 끝내 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고 주장했다(東京日日新聞 1882.3.4일자).

살벌하기 그지없던 19세기 말엽 군국주의 치하에서도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은 본래 단군(檀君)을 받드는 조선 민족의 모든 신들을 주신으로 제사 모셔 온 사당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는 학문의 자유와 양심에 입각한 이성적인 냉철한 연구론을 발표했으나 극단적인 극우 반한 세력들의 가택 습격까지 받았다.

“일제 군국주의자들은 강압적으로 구메 구니다케 교수를 도쿄대학의 현직 교수직에서 추방하고야 말았다. 그 뿐 아니라 논문을 게재한 학술지 ‘사학회잡지’와 ‘사해’는 판매금지 처분했다. 당국의 압박 뿐 아니라 황국 신도가며 극우 역사가는 박사를 불경이라 매도하며 황실(皇室)의 이름을 빌어 사회적 압박을 가했다.”(向坂逸郞 嵐のなかの百年‥學問彈壓小史 1962). 이렇듯 극단적인 황국 신도가들은 조선 단군 역사 말살책에 광분했다.

맺 음 말

근년에 와서도 황국사관은 한일관계사를 부당하게 왜곡하고 있어서 양식 있는 역사 학자들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가토 아키라(加藤章) 교수는 “생각하자면 전후사(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 속에서 역사교육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은 ‘황국사관’으로부터 껍질을 벗는데서 시작되었다.

과거의 국사교육(일제시대의 잘못된 신도주의 황국사관 교육, 필자주)에 대한 틀 바꿈이 시행되었으며 그 후에 학습 지도요령이 거듭하여 개정되었다. 그러나 역사교육의 목표나 내용에 있어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이웃나라이면서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본 측으로서는 자각적으로 충분한 검토를 하는 일이 시행되어 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철저하게 행해진 일본 제국주의 비판 하에서 자라난 세대와 일본의 전후세대 사이에는 한국에 대한 역사교육에 있어서 커다란 간격이 벌어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日韓歷史敎育交流のなかで, 1993).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일본의 신궁(神宮)이라는 호칭 그 자체조차 조선이 일본보다 더 빠르다. 신라는 지증왕(500~513 재위) 때 신라 시조 박혁거세 강림 탄생의 성지(聖地)인 나을(奈乙, 경주의 옛 이름, 필자주)에다 신궁(神宮)을 세웠다.”며 신라에 의하여 일본에 신궁이 처음으로 선 것을 밝혔다.(上田正昭 石上神宮と七支刀 1973).

아직도 일본의 잘못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불법 침략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가 일찍이 상고시대 일본 땅에 공고하게 심었던 우리 국조 단군왕검의 천신 신앙에 대한 역사를 바로 익히도록 힘쓰는 것이 한일 관계사 정립의 기틀이 된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