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넘어선 창의력과 도전정신의 상징 장영실. 서양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천체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 자동계측기를 갖춘 물시계인 자격루,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도록 한 수표, 그리고 기존 동활자의 단점을 보완한 금속활자인 갑인자 등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쏟아낸 인물.  그의 브레인파워를 살펴보자.

뇌의 한계는 없다, 단지 스스로 정한 한계만 있을 뿐

▲ KIST에 있는 장영실 동상
세종대왕 시절, 찬란한 과학문명의 정점에 서 있는 장영실. 그러나 그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관노였다. 탁월한 재능으로 세종에게 발탁되어 노비의 굴레를 벗고 고위관직에까지 오르지만 이후의 궁궐 생활 속에서도 끊임없는 멸시와 견제를 받았다. 그가 세종의 특명으로 중국에 유학하여 천문기기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돌아오자 세종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효율적으로 기구를 제작할 수 있도록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세종 재위 24년(서기 1442년)에 그가 감독하여 제작한 어가를 세종이 사용하다가 부서지는 사고가 빌미가 되어 30여 년간의 찬란한 공적을 뒤로한 채 하루아침에 불경죄로 파직되고 만다. 그를 노비에서 정3품까지 올리며 지극히 아꼈던 세종도 더 이상 구해주지 못했으며 이 사건 이후 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장영실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그는 자신의 신분을 탓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현실에 집중하고 성실히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래현 소년 관노로 있던 시절에도 그는 일을 마치면 틈틈이 병기창고에 들어가 병장기와 공구들을 말끔히 정비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마음가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성실하게 현재에서 최선을 다하는 정신 때문에 현감의 신임을 얻고 세종에게 발탁된 것이 가능했다.

현대의 제어계측을 앞서간 보편성과 독창성

▲ 자격루
장영실은 중국 유학을 다녀왔고 중국과 이슬람의 선진기술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국제교류가 활발했던 과학자였다. 하지만 모방 수준이 아니라 이들 기술을 융합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기기를 만든 기술 혁신가였다. 그는 필요한 기술이라면 어느 나라의 것이건 찾아보고 비교, 연구해서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현재 상용되는 1만 원권 지폐에도 나와 있는 자격루自擊漏다. 자격루는 단순한 물시계가 아니다. 자격루에는 물의 흐름을 이용해 자동으로 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자동제어 장치가 갖춰져 있다.

하루를 2시간씩 나눈 12지시마다 종이 울리고 밤 시간인 5경에는 북과 징을 울리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12지시마다 자시子時에는 쥐, 축시丑時에는 소처럼 각각의 시간에 해당하는 동물 인형이 뻐꾸기시계처럼 시보상자 구멍에서 튀어 오르도록 했다. 기술뿐만 아니라 디자인적으로도 탁월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세종실록》기록 등을 토대로 20여 년간 자격루의 복원에 힘써오다 지난 3월 자격루 복원 및 작동에 성공한 건국대 남문현 교수는 “자격루는 물시계의 기본인 물의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다시 일정한 시차로 구슬과 인형을 건드리도록 설계한 완벽한 자동제어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당시 중국과 이슬람의 기술에다 우리의 탁월한 제어계측 기술을 결합해 세계적인 보편성과 독창성을 구현해낸 것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장영실이 죽은 후 자격루가 손상되었을 때 고칠 만한 사람이 없어 100년 후인 1534년에야 복원했다는 사실이 그 정밀성과 함께 독창성을 입증한다.

창의적인 컨버전스로 세계를 앞서다

▲ 혼천의
자격루를 만든 지 5년 후인 세종 재위 20년(서기 1438년)에 장영실은 더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어냈다. 《세종실록》에는 옥루를 가리켜 “시간을 알리고 계절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기구들이 저절로 치고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것으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시계였다. 요즘 말로 하면 컨버전스 기기인 셈이다. 서로 다른 기능을 하나로 융합해 새로운 기기를 탄생시키는 작업인 컨버전스는 장영실이 좌뇌 위주의 논리적 사고뿐 아니라 우뇌적인 창의성과 유연성을 함께 갖추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영실은 1442년 세계 최초로 측우기도 만들어냈다.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1639년에 만든 측우기보다 200년이나 앞서 만든 것이다. 이 측우기는 강우량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의 크기, 빗방울이 떨어질 때 생기는 오차까지 고려해 만든 과학적인 것으로 현재 세계기상기구 WMO가 정한 측정오차에도 합격할 만큼 뛰어나다고 하니 새삼 경탄하게 된다.

자신만이 가진 두뇌 재능에 100% 집중하다

사농공상의 신분차가 엄격하던 시대에 천한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나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과학자의 반열에 오른 장영실. 비록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 갑작스레 허무하게 추락하고 말았지만, 그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 넘어설 수 없어 보였던 신분의 한계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완전히 집중했고, 끊임없이 가능성을 키워가며 그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정점의 자리까지 올랐다.

누구나 자신만이 가진 두뇌의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한다. 장영실은 그러한 자신의 재능을 극한까지 키워간 인물이었다. 노비라는 장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직 하나의 길만을 걸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였으며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의 뇌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창의적 산물로 탈바꿈 시켜놓았다. 장영실의 삶은 자신이 가진 작은 단점들에 신경 쓰느라 자신만이 가졌을지 모를 많은 장점은 오히려 잊고 살아갈지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크나큰 메시지를 던져준다.

글·장래혁 editor@brainmedia.co.kr

* 이 기사는 한국뇌과학연구원 발행 <브레인>과의 제휴를 통해 본지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