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intro 오늘은 6.25 한국전쟁 발발 65년이다. 그러나 분단은 광복과 함께 시작됐다. 이를 광복․분단 70년으로 본다. 한국은 불과 반세기만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뤘다. 그러나 분단을 넘어 통일이라는 시대적인 과제를 떠안고 있다. 코리안스피릿은 으로 1부 학교 통일교육, 2부 통일인성교육 강사좌담회, 3부 통일 전문가 인터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은 유난히 전쟁과 전투가 많이 일어난 달이다. 가깝게는 서기 1999년 6월15일의 1차 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의 2차 연평해전이 있었고, 1950년에는 6.25동란이 있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로 양력 5월 23일이므로 6월에 가깝다. 문약하고, 무능했던 선조(宣祖)는 울부짖는 백성들과 수도 한양을 버리고 개성
어릴 적 나는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 어려움 속에서 끝까지 자신의 꿈을 추구한 위인, 생과 사의 기로에서 옳은 선택을 한 위인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감동시켰다. 그 중 이순신의 위인전을 가장 많이 읽었다. 어린 내게도 충무공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싸움이 한창이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비장하고 장렬한 최후. 위인전을 덮을 때마다 가슴이
유성룡 대감의 ‘징비록’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아! 임진왜란은 실로 참혹했다. 수십 일 만에 한양, 개성, 평양을 잃었고, 팔도가 산산이 부서졌으며, 임금께서 난을 피해 한양을 떠나셨음에도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나라를 보존하라는 하늘의 뜻이다." 유성룡이 스스로 쓴 '징비록' 서문의 몇 줄에 임진왜란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들어 있다. 임진왜란은
“나와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전남 무안의 남악고등학교 강당에서는 600여 명의 목소리가 우렁차고 당당하게 울려 퍼졌다. ‘사랑합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 영상이 나올 때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가슴 벅찬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대한민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은 강당에 모인 아이들을 한마음로 이끌었다. 지난 22일 전남국학원 조은세 강사는 남악고등학
임진왜란은 가히 세계대전이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1,100여만 명, 명나라는 약 1억 5,000만 명, 일본은 2,200여만 명으로 조선의 두 배이었다. 임진왜란에 투입된 각국의 병력은 조선이 9만7,600여 명, 명나라가 19만1,000명, 일본이 34만 여 명으로 모두 약 63만 명이 된다. 대한해협을 건너온 일본 수군의 함선 수만 해도 800여 척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 제470주년 기념행사가 28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열린다.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소장 최이태)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탄신을 기념하고 숭고한 애국정신과 국난극복 의지를 널리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 제47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한다고 밝혔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기념 다례(茶禮)는 ▲ 초헌관(初獻官, 현충사관리
[5]편("클릭" 한민족은 가위바위보만 알아도 깨닫는다)에 이어...지금 국학원과 한민족 역사문화공원에는 꽃들이 아우성치듯 피어나 서로 나를 보아달라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어느새 산수유가 지더니 목련꽃 역시 시들었다. 샛노란 개나리꽃 속으로 푸른 잎이 돋더니 아프도록 화려한 꽃 잔디가 걸음을 잡는다. 골짜기엔 곧 진달래가 수줍게 피어나고 축대 가득히 영
드라마 '징비록懲毖錄'에서 왜군의 진격에 공포에 질려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망하려는 선조를 한사코 말리면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울부짖는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로!" 그런 서애를 뿌리치고 한양을 빠져나가면서 선조는 유성룡에게 ‘유도대장(留都大將)’을 제수한다. 말이 좋아 대장이지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왕이 없는
도부신인의 진술에 따르면, 그 발병한 날이 2013년 1월 15일이었다. 그는 S재벌회사의 재무회계 부서에서 근무하였다. 6개월쯤 회사생활을 했을 때 이대로 월급쟁이로 일생을 살아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회사에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모 대학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되는 때 수업 도중에 갑자기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