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대감의 ‘징비록’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아! 임진왜란은 실로 참혹했다. 수십 일 만에 한양, 개성, 평양을 잃었고, 팔도가 산산이 부서졌으며, 임금께서 난을 피해 한양을 떠나셨음에도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나라를 보존하라는 하늘의 뜻이다."

  유성룡이 스스로 쓴 '징비록' 서문의 몇 줄에 임진왜란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들어 있다. 임진왜란은 전대미문의 국가적인 참극이었고, 임금은 마냥 도망쳐 다닌 전쟁의 과정과 한민족의 잠재의식 그대로 ‘하늘의 보우하심’을 잊지 않고 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의 첫날 기록이다.

“임진년(1592년)초1일. 임술.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타 봉이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 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병사兵使(병마절도사)의 군관 이경신이 병마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장전, 편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와 바쳤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어느 날이거나 먼저 그날의 날씨, 바다상태와 바람 등을 간략하게나마 꼭 기술함으로써 수군제독으로서의 최고의 전략적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한다. 새해 첫날,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사랑의 깊음과 전문직을 수행하는 공인으로서의 식견과 정보가 간결하게 적혀있다. 특히 '난중일기' 전편을 통하여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당사자의 이름을 분명하게 적시 한 것은 평소 장군의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알려준다.

▲서애 유성룡 대감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일본은 전쟁이 길어지면서 승리가 보장되지 않자, 본색을 드러내어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베어 오라고 잔인한 명령을 내린다. 나아가 그 영수증을 주고받으며, 조선에서 보내온 조선인들의 코와 귀 무덤을 일본 본토에 만들어 침략을 자랑스럽게 기념하고 있다. 거기에서 나온 속담이 번잡하게 떠드는 아이들에게 경고하는 말로 ‘에비에비’가 있다. 본래는 ‘이비이비耳鼻耳鼻’이다. 시끄럽게 떠들면 ‘왜군이 와서 귀와 코를 베어 간다.’라는 민족적인 두려움이 잠재의식화 하였다. 

  전쟁 중 조선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성룡 대감과 이순신 장군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다. 유성룡 대감은 조선군 최고의 사령관이었음에도 명나라 군대의 이여송 도독에게 일본과의 강화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끌려가서 곤장을 맞을 뻔하였다. 정유재란 초기에는 이순신 장군도 명나라 해군 제독 ‘진린’의 부하가 되어 사사건건 간섭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역죄로 다스리려는 선조의 고문과 전투 중의 부상과 어머님의 별세, 조선 수군의 전멸로 54세의 늙음 몸은 무너져 내린다. 1597년, 그런 몸으로 이순신 장군은 3차에 걸쳐 장정을 한다. 1차 장정은 옥에서 풀려나 4월 3일 서울에서 4월 27일 순천까지 358.7km의 거리를 백의종군한다. 가는 도중, 어머님의 죽음을 당하니 실제로는 12일 간, 하루 70~80리의 강행군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보통 여행객들의 하루 걸음이 30~40십리 정도임을 비교하면 아무리 군인들의 이동이지만 무리가 쌓일 수밖에 없었고 내내 병에 시달린다. 2차 장정은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수군이 전멸하자 망연자실한 권율 장군은 백의종군하면서 채소밭을 가꾸던 이순신을 찾아와 자문을 구한다. 이에 이순신은 “직접 전장을 돌아보고 계책을 세우겠다.”며 군관 9명과 함께 즉시 출발하여 1597년 7월18일부터 15일간 280km(700여 리)를 하루 40~50리 꼴로 돌파하면서 전장의 참혹함을 몸소 새긴다. 3차 장정은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뜻밖의 복직 후, 1597년 8월 3일부터 15일간 330km(820여리)를 하루 50~60리씩 이동하면서 군량미, 무기, 장졸을 모집하며 마지막 해전을 구상하고 준비한다. 경남 진주 수곡면 원계리에서 교지를 받고 출발하여 원계-하동-두치-구례-압록-강원-곡성-옥과-석고-강정-부유창-순천-낙안-조양창-보성-백사정-군영구미를 통과하여 회령포에 도착하여 ‘배설’로부터 전선 12척을 인수받는다.

  장군은 마음 놓고 서해를 통해 한양으로 올라가려는 일본 수군의 진격을 피하여 아슬아슬하게 서쪽으로, 서쪽으로 후퇴한다. 해남의 이진에서는 인사불성의 지경에 이를 만큼 고열과 토사곽란을 견디고 ‘와끼자까’의 기습을 물리치면서 필사적으로 전투를 준비한다. 마침내 절체절명의 시기와 장소인 울돌목 ‘명량’에서 대승을 이루고 나라를 구하신다.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안 되어 막내아들 ‘이면’이 고향 집을 급습한 왜군의 칼 아래 전사한다. 1597년 10월 14일, 그 날의 '난중일기'이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 만은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 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이 남아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나기가 일 년 같구나!"

그로부터 약 1년 1개월 후인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은 차가운 노량바다에서 “나는 도(道)를 다하기 위하여 총을 맞은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전사하신다. -은봉야사별록. 은봉 안방준隱峰 安邦俊(1573~1654)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하여 의병활동을 하였고, 그 공으로 이조판서 추서받은 선비- ‘난중일기’는 1598년 11월 18일로 마감되고 다음날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면서 동시에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끝난다.

같은 날, 유성룡 대감은 선조에 의하여 파직을 당하고 안동으로 낙향한다. 조정의 부름에도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고 후세를 위하여 ‘징비록’을 저술 한다. 조선에서 완전히 패망하어 철군한 일본은 2년 뒤인, 1600년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토요토미히데요시 가계’는 절멸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다. 1644년, 명나라는 청나라에게 멸망한다. 조, 명, 일 삼국 중, 가장 약체였던 조선만이 살아남았으니 한 줌의 충신들과 정신 바른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권층의 끝없는 분열로 결국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6년간 지배를 당한다. 다시 UN군에 의하여 나라를 되찾았으나 참담한 6.25 동란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었고 겨우 나라를 추슬러 지금에 이른다. 유성룡 대감은 자탄한다. “나같이 못난 사람이 난리가 나고 국정의 질서가 무너져 어지러운 때에 국가의 중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잡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 참극이 ‘필사즉생’의 각오로 ‘징비’되지 않고 오히려 커지면서 대물림 되는 현실이다. 지금의 정부와 공직자들, 정치권,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정신을 바로 차려서 남의 철학, 남의 사상, 남의 종교, 남의 문화에 놀아나지 말고 우리의 것, 홍인인간 철학을 되찾아야 한다. 두 분이 목숨 바쳐 이루신 것은 오직 ‘효孝’이고 효는 만학의 중심이다. 부모에 대한 효孝가 자라서 나라 충忠이 되며 충이 자라 하늘에 대한 효가 되니 곧 도道이다. 홍익인간은 효충도孝忠道人이고 한민족의 얼이다. 조화로운 홍익인간 철학만이 영원한 인류평화 실현의 정도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의 얼을 되찾아 전 세계에 평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국학원 상임이사,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