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기가 추락한 무인도에서 랠프는 눈을 뜬다.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와 고립된 소년들은 모래사장에 모여 구조를 기다리며 살아남기 위해 무리의 규칙을 정립하고 리더를 선출한다. 리더가 된 랠프는 뚱보의 비호와 함께 ‘소라고둥’으로 발언권을 분배하고 소년들을 통제하며 민주적인 체제를 만들어 가려고 애쓴다. 한편 잭 메리듀는 사냥과 피의 세계에 매혹되어 내면의 야생성을 깨우게 되고 랠프와 대립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설고 무서운 미지의 존재를 조우한 후 그들의 모험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 른다.
어른 없는 무인도에 남겨진 소년들의 생존기를 다룬 《파리대왕》은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윌리엄 골딩의 대표작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상을 목도했던 골딩의 인간 체험이 진하게 녹아 있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원조이기도 하다. 《타임》선정 현대 100대 영문 소설,《뉴스위크》선정 100대 명저, BBC 선정 ‘세상을 바꾼 100대 소설’, 미국 대학위원회 선정 SAT 추천 도서 등에 이름을 올렸다. 《파리대왕》은 스티븐 킹, 이언 매큐언, 말론 제임스,《헝거 게임》시리즈 작가 수잔 콜린스, 시인 벤 오크리 등 수많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영국 소설가 윌리엄 골딩(1911~1993)의 《파리대왕》을 원작으로 한 최초의 그래픽 노블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이 나왔다. 《파리대왕》 초판을 펴낸 영국 Faber&Faber 출판사가 기획하여 《파리대왕》 출간 70주년 2024년 9월을 맞아 전 세계 동시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민음사가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각색 및 그림 아메 데용, 이수은 번역)을 출간하였다.

각색과 그림을 맡은 아메 데용은 생미셸상 등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네덜란드의 일러스트레이터다. 데뷔작 《벌매의 귀환》과 이어진 그래픽 노블 작업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를 강렬한 그림과 통렬한 이야기로 묘사해 비평가 다수의 찬사를 받고 프랑스, 미국, 일본 등에서 상을 받았다. 만화계의 오스카로 일컬어지는 아이즈너상 후보에 꾸준히 지명되고 있다.
데용은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속 모든 대사와 지문을 원작 텍스트를 그대로 따 왔다. 작품을 재구성하면서도 골딩의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을 온전히 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구성, 색채, 분위기 등을 통해 원작의 의미를 새롭게 하면서도 원작 텍스트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은 세심한 노력이 돋보인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손으로 직접 그린 펜 드로잉과 수채화 채색 작업으로 완성해 낸 ‘어른 없는 세계’를 전체 컬러 페이지로 선보인다.
아메 데용의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은 원작 소설의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서정적인 수채화 이미지로 탁월하게 치환해 낸다. 감정을 억제한 원작의 건조함은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그래픽 아티스트의 시각화를 통해 중화되고, 독자가 이 작품의 핵심에 쉽게 이르도록 상상의 재료를 풍부히 제공한다. 골딩 특유의 시적이고 간결하면서 리드미컬한 문장들이 그림을 따라 흐르듯이 배치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파리대왕’의 실체를 마주하는 장면, 소년들이 멧돼지를 사냥하고 잔치를 벌이는 장면, 온 섬이 불타는 장면 등은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채색과 역동적인 펜 터치, 거대한 스케일 표현으로 독자들이 즉시 몰입해 마치 그 무인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원작 서사를 압축하고 각색한 솜씨뿐만 아니라, 원작의 문장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데용의 안목이 돋보인다. 이번 작품은 원작에 거의 근접하면서도, 원작의 감응력은 한결 강화한 그래픽 노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