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조선을 흔히 남성 중심의 사회라 하고 문인으로는 송순, 정철, 이황, 조식 등 남성 문인들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천재적인 예술성과 문학성을 발휘한 여성들이 있다. 송덕봉, 신사임당, 허난설헌을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이라 한다. 그들의 삶을 이 시대 새롭게 조명해본다.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내 허난설헌의 영정. 초당 허엽의 딸인 허초희는 문장으로 유명한 강릉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진 강나리 기자.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내 허난설헌의 영정. 초당 허엽의 딸인 허초희는 문장으로 유명한 강릉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진 강나리 기자.

1563년과 1564년 동양 조선 땅에 허난설헌의 고고성이 울리고, 서양 영국 세익스피어 신생아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한 해 차이로 출생연도를 달리 했으나 문필가, 작가라는 공동 코드가 생애를 지배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특이한 점은 시참(詩讖)이다. 즉, 우연히 지은 시가 뒷일과 꼭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죽음의 예언시가 시참이 되었다.

전남 담양군 내 한국가사문학관 제2실에 발을 딛고 왼쪽으로 돌아서서 가사 연대기를 훑어가다가 허난설헌이 1563년생임을 확인했다. 규방에서 한숨을 토하며 한에 젖어 산 여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널리 불리는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고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그는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고 불렸다. 15세에 김성립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는 못했다. 시댁과의 불화, 자녀의 연이은 죽음,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동생 허균의 귀양 등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

(왼쪽)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천허씨 묘역 아버지 허엽의 묘소 옆에 서 있는 허난설헌의 시비. (오른쪽) 허난설헌의 생가에도 그를 닮은 매화가 활짝 핀다. 사진 오소후 시인.
(왼쪽)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천허씨 묘역 아버지 허엽의 묘소 옆에 서 있는 허난설헌의 시비. (오른쪽) 허난설헌의 생가에도 그를 닮은 매화가 활짝 핀다. 사진 오소후 시인.

그의 시는 213수가 전하는데, 도가사상의 신선시와 삶의 고민을 드러낸 작품으로 나뉜다.

"비단 띠 깁 저고리 적신 눈물 자국
여린 방초 임 그리운 한이외다
거문고 뜯어 한 가락 풀고 나니
배꽃도 비 맞아 문에 떨어집니다.
달빛 비친 다락에 가을 깊은데 울안은 비고
서리 쌓인 갈밭에 기러기 내려앉네
거문고 한 곡조 임 보이지 않고
연꽃만 들못 위에 떨어지네"   
- 《허난설헌집》

허초희가 죽은 후 살아생전에 지은 시를 엮은 유고집으로 〈난설헌집〉이 있다. 그 속에 국한문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전한다. 그는 나이 27세 되던 해에 홀연히 의관을 정제하고, 집안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 9의 수(27세)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 야사총서인 『패림(稗林)』의 「이순록二旬錄」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연꽃 스물 일곱송이’는 그녀의 향년 연수와 같으니, 실로 자신의 죽을 나이를 예견한 ‘시참詩讖’이라 할 만하다.

허난설헌(허초희)가 태어난 강릉 초당동 고택. 사진 강나리 기자.
허난설헌(허초희)가 태어난 강릉 초당동 고택. 사진 강나리 기자.

나는 어느 봄날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에 앉아 벚꽃비를 맞았다. 허초희는 아들과 딸을 강보에서 잃었고 또 한 아이를 유산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이 일만은 하늘을 보고도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당시 여성의 삶은 남편 그리고 자식에 의해 완성될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꽃비조차 하염없다. 그녀의 혼령을 위해 기도했다. 사람은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다. 하슬라(강릉의 옛지명)의 봄이 슬퍼진다. 그러나 또 이곳을 찾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의 문학도 별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 셰익스피어. 그는 당대에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명성을 누렸다. 사진 Pixabay 이미지.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 셰익스피어. 그는 당대에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명성을 누렸다. 사진 Pixabay 이미지.

한편,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 셰익스피어(Shakespeare, William. 1564-1616)는 1564년 출생했다. 허난설헌이 태어나고 바로 다음 해에 출생한 것이다.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등 4대 비극을 탄생시켜 영국이 낳은 국민 시인이며, 현재까지 가장 뛰어난 극작가로 손꼽힌다.

그의 언어는 시대와 지역 언어를 초월하는 보편성과 예술성, 그리고 인간 내면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풍부한 상상력과 언어 구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154편 중 18편은 영화 ‘노메드랜드’에서도 소개되었다. 소네트의 주제도 사랑, 시간, 예술, 아름다움, 인간 존재의 의미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소네트 18(sonnet 18)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Sometime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And often is his gold complexion dimmed;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s declines,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ed;

그대를 여름날과 비겨 볼까?
그대 더 아름답고 더 온화하여라.
거친 바람은 5월의 향긋한 꽃봉오리 뒤흔들고
여름의 기간은 너무나 짧아라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쬐고
금빛 얼굴에는 흐려지기도 하여라
어떤 미인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 기우나니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아름다운 자태 일그러진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의 배경이 된 크론보르(Kronborg)성. 사진 Pixabay 이미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의 배경이 된 크론보르(Kronborg)성. 사진 Pixabay 이미지.

그중 1609년에 지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1은 자신의 죽음에 관한 시이다.

소네트 71(Sonnet 71)

No longer mourn for me when I am dead
Than your shall hear the surly sullen bell
Give warning to the world that I am fled
From this vile world with vilest worms to dwell:
Nay, if you read this line, remember not
The hand that writ it, for I love you so
That I in your sweet thoughts would be forgot,

내가 죽거든 싸늘하고 음산한 종소리(鐘)를 듣고
종소리보다 오래 애도하지 마세요
가장 더러운 구더기와 살려고
내가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났다고 세상에 경고하세요.
이 시구를 읽어도 시를 쓴 손을 기억하지 마세요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그대의 향기로운 머리에서 잊혀지길 바라니까요.

한국가사문학관 내 정자 세심정에서 허난설헌과 셰익스피어, 동양과 서양에서 동시대에 태어난 두 천재의 서로 다른 삶을 이어보았다. 그리고 잠시 덴마크 여행 때 둘러본 ‘햄릿’의 배경이 된 크론보르성(Kronborg)과 감옥 절벽, 바다를 떠올렸다.

문득, 봄꽃 향기가 나를 에워싼다.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 대사를 들던 강의실이 그립다.

오소후 시인(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 명인)
오소후 시인(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 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