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신부는 1876년에 출생하여 파리외방전교회원으로 1899년 1월에 한국에 온 사람이었다. 그가 신천에 공소를 세워 전교에 전념하고 있을 때, 안중근은 그를 만났다. 곽 신부는 홍콩에 들러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당에 들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뜻밖에 만나게 되어 몹시 반가워하였다. 그들은 안중근이 묶고 있는 여관으로 갔다. 

“네가 왜 여기에 왔느냐?”
“신부님께서 지금 한국의 비참한 소식을 듣지 못하셨소?”
“이미 오래 전에 들었지.”
“나라꼴이 그와 같으니, 형세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부득이 가족들을 외국으로 옮겨다가 살게 해 놓은 다음에, 외국에 있는 동포들과 연락하여,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억울한 사정을 설명해서 동정을 얻은 후에,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서 한번 의거를 일으키면 어찌 목적을 못 하겠소?”
 
그러나 곽 신부는 아무 대답 없이 한동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종교가요 전도사라 전혀 정치에 관계가 없기는 하다마는 지금 네 말을 듣고 뜨거운 정을 아니 느낄 수가 없구나. 너를 위하여 한 방법을 알려줄 것이니, 만일 이치에 맞거든 그대로 하고, 그렇지 못하거든 뜻대로 하라.”
“그 계획을 듣고 싶소이다.”
“네가 하는 말로 그럴 수는 있다마는 그것은 다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이다. 가족을 외국으로 옮긴다는 것은 틀린 생각이다. 2천만 민족이 모두 너같이 한다면 나라 안은 온통 빌 것이니 그것은 곧 원수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는 것이다. 우리 프랑스가 독일과 싸울 적에 두 지방을 비워 주어 빼앗긴 것을 너도 아는 것이다.“
 
곽 신부가 말한 두 지방은 알사스와 로렌인데 프랑스의 동북부에 있던 지방이다. 자원이 풍부하고 군사적 요충인데다가 프랑스인과 독일인이 섞여 살아서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가 오랜 역사를 두고 이 두 지방을 차지하려고 다투어 오던 곳이었다. 보불전쟁 때는 독일령에 속했다가 1919년에 프랑스에 복귀했다.
 
“지금껏 그 땅을 회복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 곳에 있던 유지당들이 온통 외국으로 피해 가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니 그것으로써 본보기를 삼아야 할 것이다. 또 해외에 있는 동포들로 말하면 국내동포에 비해서 그 사상이 배나 더하여 서로 모의하지 않아도 같이 일할 수 있으니 걱정할 것 없으나, 열강 여러 나라의 움직임으로 말하면 혹시 네가 말하는 억울한 설명을 듣고서는 모두 가엽다고 하기는 할 것이나, 그렇다고 반드시 한국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켜 성토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옛 글에 일렀으되,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이 돕는다’ 했으니, 너는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서, 먼저 네가 할 일이나 하도록 하라.”
 
곽 신부가 안중근이 알아듣게 설득하고 나서,
 
“첫째는 교육의 발달이요, 둘째는 사회의 확장이요, 셋째는 민심의 단합이요,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니, 이 네 가지를 확실히 성취시키기만 하면 2천만의 정신(마음)의 힘이 반석과 같이 튼튼해서, 비록 천만 문門의 대포를 가지고서도 능히 공격하여 깨뜨릴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한 지아비의 마음도 빼앗지 못한다는 그것이거늘 하물며 2천만 사람에 정신(마음)의 힘이겠느냐. 그렇게 하면 강토를 빼앗겠다는 것도 형식상으로 된 것일 뿐이요 조약을 강제로 맺었다는 것도 종이 위에 적힌 빈 문서라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같이 하는 날에야 정확히 사업을 이루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니 잘 헤아려 보아라.”
“신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안중근은 곽 신부가 이르는 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곧 행장을 차려 기선을 타고 진남포로 돌아왔다. 그때가 1905년 12월이었다. 진남포에 있는 친지에게 집안의 소식을 물으니, 자기가 집을 떠나 있는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 가족이 청계동을 따라 진남포로 왔는데,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가족은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다시 가서 장례를 모셨다. 안중근은 통곡하며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다음 날, 안중근은 진남포를 떠나 청계동 집에 도착하였다. 그는 상청을 차리고 며칠 동안 재계齋戒하여 상례를 마친 후에 가족들과 함께 그해 겨울을 났다. 안중근은 그때 술을 끊기로 맹세했고 그 기한을 대한이 독립하는 날로 정했다. 안중근은 다음해인 1906년 3월에 가족들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났다. 진남포에 양옥을 1채 지어 살기 시작하였다.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삼흥학교三興學校(후에 오산학교로 개명하였다)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교무敎務를 맡아 재주가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곽 신부에게서 들은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학생들은 귀가 열리고 머리가 깨어 열심히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도산 안창호安昌浩가 진남포의 오성五星학교 교정에서 연설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창호가 진남포에 도착했다. 안중근은 그가 어떤 인물인가 찾아가서 만나보았다. 그는 평양 출신으로 안중근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첫 대면이었다. 
 
“사재를 털어 삼흥과 돈의 두 학교를 세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안창호가 안중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민족이 독립하려면 교육을 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안중근도 말했다. 그들은 민족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음 날은 안창호가 연설하는 날이었다. 안창호는 조용한 자세로 단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모여든 군중들을 향하여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많은 사람이 알아듣게 말하였다. 그는 지금 조국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으로 바라보며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주로 이토오가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의 말에는 이제 나라가 망했다는 강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므로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자면 민족을 자각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소리 지르지 않았어도 청중을 들끓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로 단합시키는 힘도 있었다. 흥분하여 당장 뛰쳐나가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연설회가 끝나고 군중들은 아쉬움과 울분을 품고 흩어졌다. 안중근도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다음 해(1907년)는 1월말에 대구에서 서상돈徐相敦(1851~1913), 김광제金光濟 등 광문사廣文社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발기하여 전국적으로 이 운동이 확대해 간 해였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가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여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에 크게 힘이 되었다. 국채란 이완용 내각이 일본정부로부터 차관한 1,300만 원을 조속히 보상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는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梁起鐸을 국채보상금횡령으로 구속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국체보상운동이 진남포에도 전해 오던 때 봄에, 어떤 사람이 안중근을 찾아왔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상을 살펴보니, 위풍이 당당하여 자못 도인道人의 풍모가 있었다.(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