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국 대신들 협박에 동원된 일본군 장성들.

일본의 요구로 한국정부는 5월 18일 러시아와 맺은 조약과 협정을 폐기하였다. 8월 22일에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한일협정서 또는 한일협약)을 맺어 정부에 재정고문, 외교고문을 두어 이들 소관 업무를 고문과 상의하여 집행하도록 하는 고문정치를 실현하였다. 이듬해에 경무고문, 군사고문, 궁내부고문, 학무고문이 임명되어, 한국은 주권이 없는 국가가 되었다. 승전한 일본과 패전한 러시아 사이에 미국이 끼어들어 1905년 8월 1일부터 전후 처리문제에 대한 회담이 미국의 포오츠머드 군항의 해군 건물에서 열려 ‘포오츠머드강화조약’을 성사시켰다.  

일본에서는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 미주재공사 다카하라(高平小五郞)가 참석했고, 러시아에서 대신회의장이던 위테와 주미공사 로오젠이 참석했다. 그러나 미국이 회의장의 자리를 차지하여 이 회담은 2자회담이 아니라, 3자회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포츠머드강화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에서의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받았고, 러시아는 화태도의 북위 50도 이남을 일본에 할애했다. 미국은 일본의 한국의 식민지화를 눈 감아 주는 대신에 일본으로부터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한다는 묵계를 받아내었다. 
 
일본의 제23여단이 한성을 점령했을 때인 6월에 일본은 노골적으로 한국정부에 황무지개척권과 전시징발권을 요구했다. 당시에 한국은 전국토의 1/4이 황무지였으므로, 이는 한국 땅의 1/4을 먹어치우자는 수작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전시징발권戰時徵發權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한국의 백성을 써먹겠다는 것이었다. 
 
한성에서 보민회保民會가 각 도에 통문通文을 돌려, 일본에게 황무지를 내주지 못하도록 궐기하여 일어났다. 보민회의 지도자인 신기선과 박기양이 일인에게 잡혀갔다. 그러나 보민화가 7월에 다시 일어나서 7월 13일 국민회의를 열었고, 연일 가두집회를 열었다. 종로거리는 상가가 모두 문을 닫았고, 전차가 운휴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정부는 당황하여 매일 칙사를 내어보내어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강제해산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집회는 종로에서 전동典洞의 한어학교漢語學校로 옮겼다. 학교 문밖에 태극기를 달았고 순검들이 지켰다. 7월 22일 일본은 드디어 무장군인을 풀어 군중을 해산시켰다. 회의장은 수라장이 되었고, 많은 군중이 병원으로 실려갔다. 군중은 흥분하여 밤늦게까지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정부는 “촌토寸土의 땅도 외국인에게 양도하지 않겠다.”고 공약했고, 안보회의는 해산했다. 이번 사건으로 일본은 한국에서 치안유지권治安維持權을 빼앗아갔다. 전시징발권戰時徵發權도 각 마을에 시행되었다. 정부는 대읍에 100명, 소읍에 70~80명의 인원을 뽑아 올리도록 하였다. 그들에게 지급할 세전(貰錢:월급) 1천여 원도 고을 사람들이 내도록 하였다. 
 
나라가 주권을 잃자, 민심은 흉흉해졌다. 시흥에서 폭동이 일어나 주무관主務官이 타살되었고, 직산에서 군수가 백성에게 맞아 죽었다. 정부에서 세전 걷는 일을 중지한다는 훈령을 내렸다.일본은 하야시를 내세워 보호조약 체결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일본정부가 요긴하게 써먹은 사람이 이용구, 송병준, 윤시병이 이끌어가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였다. 일본인 우찌다(內田良平)라는 자가 일본군부와 일진회를 연결해 주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또 일본공사 하야시와 일진회를 연결해 주는 사세(佐瀕熊鐵)라는 자도 있었다.
 
1905년 11월에 이토오가 일본의 전권대사로 대한국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토오가 한일합방작업을 하고자 대한국을 협박하러 오는 것이었다. 이토오는 군부 출신이 아니라 문관 출신이므로 하야시와 함께 일진회를 이용하려 들 것이 뻔했다. 사세와 송병준은 이번 기회에 군부와 손을 끊고 이토오에게 붙기로 하였다. 사세와 송병준이 만나서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토오 후 전권대사가 내한하면 군부와 일진회의 관계가 끊어지게 될 것이요. 이제 한국에서 군의 역할은 끝났기 때문이요.”
 
사세가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그러나 일진회를 운영할 재원이 문제요. 일진회 회원이 1백만 명이나 되니, 재원은 그중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맙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진회와 이토오 후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요.”
 
송병준이 말했다. 사세는 하야시로부터 어떤 밀명을 띠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시행해야만 하였다. 그렇게 하면, 군부와 일진회의 관계가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이토오 후가 대한정부에 외교권의 위임을 요구할 것이요. 이를 잘 이용합시다.”
“어떻게?”
“일진회가 먼저 조약을 자청하는 선언을 해 버리는 것이요.”
 
송병준은 대한의 앞날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사세의 말 한마디로 간파했다. 대한국이 일본에게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일본에 가까워져야 할 것이다. 일본에 밀착하면, 부귀영화가 손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국정부가 지금까지 해 온 망동과 준동으로 보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용구 회장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우리 이 회장과 상의해 보기로 합시다.”
 
사세는 선언서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선언서 초안 작성이 끝났다. 11월 초하룻날, 사세는 이용구를 이화정으로 불렀다. 이 자리에 3사람이 함께 했다. 송병준은 이용구에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결론을 말했다. 
 
“이토오 후가 오면, 우리의 입장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 같소. 먼저 군부와 손을 끊는 것이고, 다음에 이토오 후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요. 우리가 먼저 선언서를 발표합시다. 일진회가 살아갈 길은 그것 밖에 다른 길이 없소.”
“좋소.”
 
이용구가 순순히 응했다.
 
“그렇다면 선언서를 내가 초안하여 일진회로 가져가겠소.”
 
사세가 말했다. 다음날 사세는 선언서 초안을 가지고 왔다. 이용구는 일진회 평의회를 소집하여 이를 알리고 자구의 수정을 홍긍섭에게 위임하였다. 11월 3일, 일본정부는 이를 발표하였다. 11월 3일은 명치천왕의 생일이었다. 
 
“대저 일본은 선진, 선각국先覺國이라, 동양의 평화 극복에 주력하고, 십수 년 내로 힘을 다하여 주선하고...선명한지라, 대일본제국이 대한국 권의權義에 대하여 양국관계가 크게 변한다는 설로, 요사의 항의가 공공연하여 전국 상하가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 유언이 백출하고, 말은 다시 와전되고 와전되어 인심이 비등하니, 이는 용혹 괴이할 것이 없다... 금일 한일 양국의 관계를 다만 구체舊體로만 회복하고자 함은 이는 거의 죽어가는 자를 불러 희생할 것을 책하는 것과 같다... 한일 양국의 관계에 장차 어떠한 변태가 일어날지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가령 외교의 권리를 일본정부에 위임하여 재외공사를 소환하는 것과 주한공사관을 철거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문제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오히려 우방정부에 위임하여 그 힘에 의지하고 국권을 보유하는 것도 역시 폐하의 대권을 발진하는데 불외不外한 것이요. 내치에 말하더라도 헛되이 사람을 고용할 필요 없이 오히려 선진국 고문을 택하여 폐정弊政을 제거하고 새 민복民福을 진하면 역시 폐하의 대권이 발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당은 공명정대하여 일월과 같이 세계의 대세를 관찰하고 동양의 시국을 감鑑하여, 우리나라의 정형情形을 보니, 다시 두 말이 있을 수 없도다. 독립 보호와 강토의 유지는 대일본황제의 조칙이 세계에 공표되었으니, 다시 의심할 바 없다...”
 
일본은 선언문을 발표하고, 본국에서 증원군을 증파하여 한성과 왕궁의 경비를 삼엄하게 하였다. 1905년 11월 9일 이토오는 일본천왕의 친서를 가지고 내한했다. 그는 정동에 있는 손탁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10일 12시에 광희 황제를 알현하였다. 이토오는 천왕의 친서를 내놓았다.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치하시라...”
 
대한을 하대하는 대단히 건방진 말투였다. 광희 황제는 병을 칭하고 이토오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후 15일 후에 이토오는 광희 황제를 찾아갔다. 그는 좌우를 모두 물리친 후에 광희 황제를 독대했다. (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