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부패가 만연하여 있다. 군대에 계급의 갈등이 심하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우세한 청나라의 군대를 이긴 것도 바로 이러한 취약점을 일본군이 파악하여 이용한 데에 있었다. 나라가 부패하면 따라서 군대도 부패한다. 부패한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고 전의를 상실한다. 군대의 생명은 계급에 복종하는 데에 있다. 계급 간에 갈등, 승진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겉으로만 복종한다. 아카시가 들고 나온 것은 러시아의 사회를 혼란시켜 군대를 일본과 싸우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막대한 공작금을 필요로 한다. 

“100만 엔이면 되겠습니다.”
“100만 엔이나?”
 
부장급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차장인 나가오카(長岡外史)가 승인했다. 그 정도로 이길 수만 있다면 해볼만 하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꿩 잡는 것이 매가 아닌가. 1902년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앞으로 벌리게 될 러시아와의 전쟁준비를 끝냈다. 이때,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평민사平民社를 주축으로 반전운동을 시작했다. 반대의 이유는 한마디로 제국주의전쟁이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평민신문을 창간하여 전쟁을 비판하고 나섰다. 따지고 보면 반체제운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상하게도 이 반체제운동을 눈감아주고 있었다. 노동법을 치안경찰법으로 탄압하는 정부로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이 반체제운동에 나섰는데, 그들은 일본인보다 과격한 인상을 주었다. 1904년 2월 8일 16시 20분 일본함대가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의 순양함 1척과 포함 1척을 격침하는 것을 시작으로 러일전쟁의 불길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평민신문은 개전 다음날, 제20호를 발행했다. 당국은 이날부터 러일전쟁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월 29일에, 평민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계속 사회주의적인 글을 게재하고 전쟁을 비판했던 편집자들이 감옥에 잡혀 들어갔고 벌금을 물어야 했다. 사회주의협회는 1904년 11월 16일 ‘안녕질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치안경찰법에 의해 해산 당했다. 이러한 탄압의 흐름 속에서도 전쟁이 한창인 그해 8월에 적대국인 러시아와 일본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미묘한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 사회당과 일본사회당, 평민사와 사회주의협회 사이에 일종의 화해 같은 것이 생긴 것이었다. 1094년 8월 암스텔담에서 모인 제2 인터내셔널 제6차 대회석상에서 일본의 대표와 러시아의 대표가 각각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단상에서 악수를 나누고, 두 나라가 서로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전쟁반대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왜 일본정부는 사회주의자들을 제멋대로 내버려두었을까?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마음대로 해외에 나가서 떠들도록 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예뻐서가 아니라 정부의 꿍꿍이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전술을 관용하는 정책을 취하여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과 손잡는 것을 전술상 허용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이 마음 놓고 자국 영토에서 날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 결국 선동을 이용하자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자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관대했으나, 러일전쟁에 대한 비판만은 철저하게 탄압했다. 아카시가 받은 100만 엔과 연관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아카시는 참모본부에서 받은 100만 엔을 가지고 주영공사관부 무관인 우쓰노미아(宇都宮太郞) 대좌와 협력하여 러시아의 반체제집단인 과격파와 허무당원들 포섭에 들어갔다. 유럽에는 많은 수의 러시아인들이 도피하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러시아가 뒤집어지기만을 기다려왔다. 
 
1904년 3월 18일 이후에 일본군 제1군의 3개 사단이 신의주를 돌파하여 만주 구연성을 거쳐 봉황성으로 북상했고, 제2군은 5월5일 요동반도 염대오로 북상하여 다이렌(大連)을 점령하고 북상하여 영구로 진출했고, 제3군은 5월부터 뤼순 탈환작전에 들어갔다.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테러리스트들은 1900년부터 각료들을 암살하기 시작하여 2년 동안 문교부장관, 비밀경찰청장관, 비밀경찰장관, 지방장관 1명을 차례로 살해하다가, 1904년 내무장관 암살을 기도했다. 1904년 10월, 파리에서 러시아의 자유당과 사회혁명당, 폴란드의 사회당, 핀란드의 헌법당 등의 대표자가 참석한 대표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제정러시아 타도를 결의했다. 이 사건 이후로 러시아에서 키에프, 오데사, 모스크바에서 반체제시위가 일어났다. 아카시는 무척 바빠졌다. 이제부터 러일전쟁에 일본이 이길 수 있도록 러시아의 내부를 와해시키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자나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는 반체제운동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세력이라는 것도 미미하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소수의 공산주의 엘리트들이 있을 뿐이었다. 러시아의 반체제시위는 이들 소수의 공산주의 엘리트에 의하여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나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회혁명당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었다.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 정부는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일으켰고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혁명의 주동자는 어느 당인가?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그러나 주동자가 없었다. 주동자가 없는 이상스런 혁명이었다. 민중이 시달릴 대로 시달리다가 자연발생적으로 일으킨 혁명이었던 것이다. 
 
이 혁명이 일어나기 3주 전인 1905년 1월 2일, 일본군 제3군이 6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뤼순을 함락시켰다. 이 패전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시아 황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반된 국민감정을 되돌려 놓을 생각을 하고 있다가 낭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군 제1, 제2, 제3, 제4군은 8월 28일에서 9월 4일까지 벌인 전투에서 사망자 2만3천5백 명을 내면서 요양을 정령했다. 일본군은 1905년 1월 하순부터 봉천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봉천에 집결한 일본군은 25만 명, 이에 맞서는 러시아군은 32만 명이었다.     
 
나라 밖에서 군대가 일본군과 전쟁을 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 10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파업이 1905년 1월 22일부터 이미 불이 질러지고 있었다. 성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푸틸로프 공업회사에서 1만3천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갔으나 고용주와 노동자의 협상이 성공할 가망성은 전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경찰이 카본 신부를 노동자들에게 파견했다. 쟁의를 온건한 데모로 돌리도록 유도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카본 신부는 니콜라이 황제에게 직소하자고 제의했고, 노동자들은 카본 신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노동자들은 황제에게 직소할 청원서를 작성했다. 
 그들이 황제에게 요구한 것은 참정권과 만인의 비공개 투표에 의한 평등한 선거권, 1일 8시간 노동제, 잔업 및 중노동의 폐지, 그리고 의료혜택 등이었다. 
 
“우리 성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은 처와 늙은 양친과 함께 정의와 보호를 찾아 폐하께 왔습니다. 우리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억압받고 있으며 고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대받고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며 슬픔과 고통을 잠자코 참아야 하는 노예로서 학대 받고 있습니다.”(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