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일전쟁 시에 일본 화가가 그린 려순구격전지도旅順口激戰之圖

7월 22일, 노동자들은 정장하고 동궁(冬宮) 앞에 모여들었다. 카본 신부가 앞장서서 전진했다. 황제의 초상화를 든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날 황제는 궁에 있지 않았다. 관리들은 이 엄청난 군중을 해산해야 하겠다는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근위연대병력이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발포하였다. 앞에 섰던 사람들이 쓰러졌다. 사태가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다. 앞사람은 흩어지려 하고 뒷사람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코사코 기병대들이 채찍을 휘둘러 후려치고 칼을 휘두르며 군중 속으로 달려들었다. 경찰들이 군중을 향하여 칼을 휘두르고 총을 난사했다. 얼어붙은 광장이 쓰러진 자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냇물을 이루었다. 어른 아이 남녀노소가 무차별로 학살당해 시체 위에 시체가 쌓였다. 살육이 저녁까지 계속되어 약 1천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했다.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진 카본 신부는 몸을 피하여 러시아의 노동자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썼다. 
 
“황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와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는 오늘 엄청난 피가 뿌려졌다. 러시아의 노동자는 이제야 말로 황제에게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의 손으로 국민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궐기해야 한다.”
 
이날이 피의 일요일이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날이라 한다. 피의 일요일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노동자의 가슴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월에 5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돌입했고, 철도를 파괴했고, 모스크바, 오뎃사, 와르소, 로지 등의 거리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보복학살이 자행되었다. 정치혁명가들이 지하에서 모습을 드러내었고, 망명지에서 국내로 잠입했다. 
 
일본의 아카시는 러일전쟁이 터지자, 스톡홀름으로 건너가 있었다. 그는 이 소요를 전국적인 무장봉기로 유도하기 위하여 러시아 과격파에게 소총 2만 정과 실탄 420만 발을 몰래 보내주었다. 소요는 걷잡을 새 없이 확산되었다. 2월에 모스크바 총독이 암살되었다. 
 
봉천에 있던 러시아의 크로파토킨 사령관은 증원군 2개 군단 10만 명이 도착하면 일본군 25만 명을 42만 명의 우세한 병력으로 일거에 섬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0만 명의 증원군은 폭동진압에 발목이 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아카시가 참모본부에서 수령한 100만 엔의 위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카시는 봉천에 육박하는 일본군에게 비밀전문을 보냈다. 
 
▲ 일본의 러일전쟁개요도. 1904년.2월.9일. 일본함대가 인천항 외항에서 러시아 순양함을 격침시킴으로써 러일전쟁의 불이 붙었다. 대한국멸망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증원군 투입 불능”
 
아카시가 100만 엔 우리 돈 약 500억 원으로 러시아군 10만 명을 사버린 것이다. 3월 1일 일본군은 봉천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10일간의 싸움으로 일본군은 7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혁명 파동으로 전의를 상실한 러시아군은 9만 명의 사상자와 2만 명의 포로를 내고 봉천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5월에 진짜 이상스런 일이 벌어졌다. 
 
메이지 천왕의 왕후는 별장에서 피서 중이었다. 그날 밤 황후는 꿈을 꾸었다. 꿈에 흰 옷을 입은 무사가 나타났다. 
 
“소신은 유신전維新前에 국사를 위해 몸을 바친 사카모도료마(坂本龍馬)라는 사람입니다.”
 
무사는 자기의 이름을 밝혔지만 왕후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카모도료마가 다시 말했다. 
 
“해군에 관한 일은 그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번 러시아와의 일에, 비록 몸은 죽어 없어졌지만 혼백은 해군에 머물러, 다소나마 힘을 보태려 합니다. 승패에는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흰옷을 입은 사람은 이 말을 하고 사라졌다. 
 
“사카모도료마란 어떤 인물이냐?”
 
왕후는 다음 날 아침에 왕후궁 대부인 자작인 가가와에게 물었다. 가가와는 사카모도료마 생전에 절친했던 인물이었다. 가가와는 그의 경력을 왕후에게 들려주었다. 사카모도료마는 일본 명치유신 때 사이고오다카모리와 쌍벽을 이루는 공훈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해군의 창설자였고, 증기선으로 해외무역을 시작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 10월혁명 포스터
 
왕후는 7일 밤에도 같은 흰옷 차림의 무사가 또 나타났기 때문에, 이는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사실을 가가와에게 밝혔다. 가가와는 기이하게 여겨서 도오쿄의 다나카 미쓰아키라에게 연락했다. 다나카와 가가와는 사카모도가 세운 육전대(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다. 다나카는 이 무렵에 궁내대신을 역임한 몸이었다. 그가 사카모도의 사진을 한 장 구해 와 가가와에게 보냈다. 가가와는 상궁을 통해 그 사진을 왕후의 방 한 모퉁이에 놓아두게 하였다. 왕후는 사진을 보고 가가와를 불러들였다.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눈이 날카롭고 눈썹이 맞붙었는데, 여윈 몸에 머리칼이 마구 흩어져 마치 굴뚝쑤시개 같았다. 편편한 어깨에 표시된 사카모도가(家)의 도라지 문장까지도 같다고 왕후는 말했다. 이 이야기는 「왕후의 기몽」으로 도오쿄의 모든 신문에 실렸던 것이라고 『료마는 간다』를 쓴 시바료타료씨가 그의 소설에서 밝힌 것이다. 
 
일본 함대는 러시아 함대와의 해전에서 이겼다. 러일전쟁의 하이라이트였다. 과연 사카모도가 왕후에게 나타나 약속한 대로 5월 27일 대한해협과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매복하여 기습을 노리던 일본함대에게 전멸한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전멸이었다. 러시아는 22척의 전함과 6천 명의 병력을 잃었다. 러시아 황제의 입장은 점점 더 불리해져 갔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소란은 여름에 더욱 극성스러워질 것이고, 혁명이 조직적인 군사행동을 띄고 있어서, 이 혁명군을 때려잡기 위해서 군대가 일본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니 될 입장에 처해 가고 있었다. 농민들은 혁명조직에 가담하여 부유한 지주의 집에 방화하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혁명의 바람은 군대에도 불어와서, 그해 6월에 흑해함대의 막강한 전함 뽀춈킨의 승무원들이, “전제정치를 타도하자! 국민의회 만세!”를 외치면서 선상반란을 일으켜 7명의 상관을 살해했다. 소련 공산당이 출현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제네바에 망명 중이던 볼셰비키 파의 두목 레닌이 나타나서 노동자들에게 폭탄을 만들고 총과 칼로 무장하라고 선동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허구의 계급을 날조하여 노동자들을 이 계급에 편입시킴으로써, 이들을 집단적인 바보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노동자들은 프로레타리아가 사기꾼이고, 도둑놈이고, 폭력배이고, 살인자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1908년에 터어키에서, 1909년에 페르시아에서, 1911년에 중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일본이 러일전쟁에 이긴 것은 한마디로 천우신조라 할 수 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사망 8만4천4백 명을 포함하여 12만 명을 잃었다. 전투병력의 60%를 잃은 것이다. 일본은 소모 장교의 보충 능력이 한계에 달해 있었다. 병참능력도 시원치 않아서 만주의 혹한에서 얼어빠진 주먹밥을 먹는 바람에 25만 명 중에 11만 명이 각기병을 앓고 있었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19억 8천4백만 엔의 전비를 쓰게 했고, 이것은 2억1천5백만 엔의 증세와 15억 6천만 엔의 국체와 임시 차입금으로 충당하였다. 국체 가운데 68%가 조건이 불리한 외채였다. 
 
러시아가 손을 들기 전에 일본은 봉천전투가 끝났을 때, 벌써 더 전쟁을 할 여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그 빌어먹을 혁명이 러시아를 패배시킨 것이다. 러시아는 비록 전쟁에 졌다고 하나, 아직도 건재한 1백만 명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9월 5일 사할린을 일본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에 조인했다. 
 
러일전쟁의 승리 뒤에서 탕자처럼 100만 엔을 물을 쓰듯 한 아카시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러시아의 부패한 관리와 군 장성들이 러시아를 일본의 군국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진상하였다. 나는 한국의 관피아와 군피아를 보면서 국민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