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화가가 그린 청일전쟁 때 일본군의 격전지도.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국의 한반도 지배권을 빼앗기 위하여 한판승부를 벌였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고, 이어서 벌인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승리하여 동양의 맹주가 되었고, 한국은 일제의 농간으로 멸망하였다.

일본은 일진회를 이용하기 위하여 정치자금을 비밀리에 제공하고 일본주차군사령부가 특별히 보호하였다. 이용구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일진회에 가입하면, 대신∙협판∙관찰사∙군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려 돈을 가진 자들을 현혹시켰다.

1905년 이용구는 이토오가 을사망국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을 때, 재빨리 선언서를 제출하여, 조선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어 일본의 보호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아첨했다. 이때 국민이 분노하여 치를 떨었다. 
 
1860년에 한반도로 들어온 서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최재우가 민족신앙으로 제창한 동학이 1905년 손병희 대에 와서 개편하였다. 천도교는 1860년을 포덕布德 원년으로 하였다. 이용구가 천방지축으로 날뛴다는 소식을 들은 손병희 대도주는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우이동 골짜기에 동학 접주들과 모였다. 
 
“이용구를 출교黜敎시킨다.”
 
는 결정을 내렸다. 이용구가 동학을 이용하지 못하게 정교분리와 사후대책을 강구하였다. 1905년 12월 1일에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도즉천도(道則天道)」에 근거를 두고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하였다.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돌아가, 동학의 종지宗旨인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포교하였다. 
 
동학의 말기에, 정부를 괴롭히고 백성을 수탈하는 부정적인 잔재인 시천교와 단절한 천도교는 새로운 정신운동과 종교운동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 일의 선봉에 섰던 분이 의암 손병희였다. 조선왕조가 대한국으로 개명을 하고 마지막 남은 안간힘을 쓰기 위하여 노력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은 화승총을 무라다소총으로 바꾼 훈련대를 시위대로 바꾸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각 도에 있는 진대에 속한 군대는 여전히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병력도 미미한 숫자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군대로 국토를 지킨다는 것은 무리였다.
 
대한국은 외세를 잘 이용하여 국가를 잘 보존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분수에 넘치는 생각이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무장이 된 사람은 천도교에 의지하고자 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총은 들려 있지 않았지만 그들이 천도교에 의지하고자 한 열망은 강렬하였다. 그러나 멸망의 길로 들어선 대한제국의 운명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멸망당한 여러 이유 가운데에서 가장 큰 이유는 제정 러시아가 일본에 패했다는 것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제정러시아는 멸망하였고 역사의 바통을 붉은 소비에트가 이어받았다. 이러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뒤에는 운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일화가 숨어 있다. 역사의 뒷골목에서 찾아낸 쥐꼬리라 할 수 있었다. 일본이 거대한 러시아를 쓰러뜨린 배후에는 아키시(明石元二郞)라는 일본의 쥐꼬리가 숨어 있었다.
 
아키시는 1902년 8월부터 러시아 주재 공사관부 무관으로 근무한 자였다. 당시의 계급은 중좌, 중견간부급에 지나지 않았다. 직책은 정보장교로서 첩보수집과 상대국 모략이 주요업무였다. 청일전쟁에 이긴 명치정부가 기고만장하여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을 때, 아키시는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비밀무기를 가지고 참모본부를 찾아갔다. 
 
“러시아 주재 공사관부 무관 아키시 중좌가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그는 신고를 하고 나서 비밀무기를 참모본부 상급자들에게 끌러놓았다. 그가 가지고 온 비밀무기는 새로이 고안해 낸 소총이나 대포가 아니라 정보장교로서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만들어 낸 일종의 ‘러시아 모략계획서’였다. 그는 자기의 계획을 승인받기 위하여 참모부의 상급자들을 두루 찾아 면담하며 자기의 생각을 밝혔다.
 
▲ 천도교의 상징적인 건물 봉황각鳳凰閣. 뒤쪽으로 서울의 주산인 삼각산의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이 보인다.
 
“아니, 이것이 무엇인가?”
 
상급자들이 먼저 보인 반응은 이러했다.
 
“우리가 이 정도로 열세라면 싸워보나 마나가 아닌가?”
 
그러다가
 
“안 되겠군.”
 
하는 것이었다.
 
“안 되겠군” 
 
하는 반응이 일본군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군대에 대하여 지식이 없는 식자나 백성들은 청국을 굴복시켰으니, 이번엔 러시아를 처 부셔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럴 무렵에 일본의 여론을 들끓게 한 요상한 사건이 한반도에서 터졌다. 용암포龍岩浦사건이었다. 
 
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 빌미가 되어, 고종황제가 러시아에 평안도 압록강하구에 있는 용암포의 벌목권伐木權)을 허가해 주면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용암포를 사이에 두고 군사기지 쟁탈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러시아는 용암포 부근 두류포의 고지를 점거하여 망루를 세우고 포대를 구축했고, 용암포와 안동현 사이에 전기를 가설하였다. 그리고 대한국 정부에 용암포의 조차租借를 요청했다.
 
일본은 전선가설을 대한국 정부에 항의했고, 조차에도 반대하였다. 용암포사건이 일본의 여론을 러시아와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 쪽으로 기울게 하였다. 참모본부에서 1903년 처음으로 개전론이 나왔다. 개전론 주장자는 “러시아는 아직 철도가 미완성 단계에 있고, 극동함대도 확장 중에 있으므로, 이때에 일본이 치면 승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여론을 주도하는 만조보萬朝報와 매일신문이 개전론을 주도했다. 동경조일신문 6월 24일자 신문에 동경제대의 박사교수 7명이 ‘7박사 의견서’라는 개전론을 주장하는 글을 실어 천왕에게 상주하였다. 이런 분위기에 아카시의 출현은 보석을 얻은 것과 같았다. 아키시는 적국인 러시아의 무력과 일본의 무력을 소상하게 비교해 놓고 있었다. 일본의 역부족을 구체적인 데이터를 들어서 지적한 후에 그 방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일본 육군은 13개의 사단, 보병 156개 대대, 기병 54개 중대, 야포와 산포 106개 중대 636문, 공병 38개 중대로, 전투 병력은 20만 명 선이었다. 해군은 군함류 76척 2십5만8천 톤, 이중 새로 건조한 1만5천 톤급 전함 4척을 포함한 6척의 전함이 있고, 1만 톤급 순양함 6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육군이 70개 사단으로, 남만주야전군이 보병 60개 대대, 기병 64개 중대, 대포 160문, 공병 2개 대대로 편성된 제1독립병단이 요양遼陽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있었고, 보병 160개 대대, 기병 36개 중대, 대포 360문으로 편성된 제2독립병단이 시베리아에 후위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외에 모스크바에 주둔한 병력은 치지 않은 것이다. 해군은 극동에 있는 것만으로도 일본 해군에 육박하는 72척에 19만2천 톤의 해군력이 있었고, 거기에 발트해의 함대를 보강하면 수적으로 2배나 되었다. 전력을 비교할 때, 일본에게 승산이 없는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러시아에 치명적인 취약점이 있습니다. 이 취약점을 우리가 잘 이용만 한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아카시는 러시아의 취약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