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문답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5조약청체전말五條約請締顚末」과 「한국특파대사韓國特派大使 이토오 복명서」에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 위풍당당한 이토오의 협박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제국의 보호 없이 생존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외교를 일본국의 보호 하에 두지 않으면 아니 된다. 폐하는 외교권을 일본에게 양도하라. 이 안은 일본이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결정한 것이므로 조금도 변경할 수 없다. 요는 페하가 이를 받아들이느냐 반대하느냐에 문제가 남았을 뿐이다. 폐하가 반대하는 것은 자유이겠으나 그럴 경우 일본정부는 이미 결정한 바 있으니,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알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더 곤란한 경우에 처하게 될 것이며 일층 불리한 결과가 초래될 것임을 각오해야 한다.”
 
▲ 1905年 11月 20日字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게재된 장지연張志淵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과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 장지연은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다.
 
 - 궁벽해진 광희 황제의 몸부림
 
“한국에서는 조종祖宗이래로 국가의 중대사건이 생겼을 때는 정부의 대소 관리와 시원임時原任 대신과 유현儒賢에게까지 자순諮詢한 후에 처결하고 또 국내의 신사, 인민의 여론까지도 채방採訪하여 시행하는 관례가 있으므로, 짐이 자의로 결정할 수 없다.”
 
-강도를 높인 이토오의 협박 
 
“정부의 신료臣僚에게 자순한다는 폐하의 말은 있을 수 있는 일이나, 일반국민의 의향을 묻는다고 함은 기괴천만奇怪千萬이다. 왜냐하면, 귀국은 헌법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만기萬機를 폐하가 친재하는 소위 군주제의 국가가 아닌가. 그리고 인민의 의사 운운하나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 제안에 반항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니, 이는 적지 않은 책임을 폐하가 자초하려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귀국의 인민은 유치하여 외교에 어둡고 세계의 대세를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 광희 황제
 
“이 조약을 인허한다면 망국과 같은 것이니, 짐은 종사宗社에 순殉할지언정 어찌 인허할 수 있겠느냐?”
 
- 이토오
 
“이 안은 결코 시일을 천연遷延할 수 없다. 지극히 조속한 결정을 요하기 때문에 꼭 정부대신으로 하여금 대체의 주의主義를 알게 하고 조속한 타결을 봄이 긴요하다. 그러니 폐하는 그 뜻을 어서 칙명으로 내려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하야시 공사의 정식 제안에 대하외부 당국이 아직 폐하로부터 칙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같은 잘못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토오가 가련한 광희황제를 협박하는 동안 하야시는 박제순에게 조회문照會文과 협박안脅迫案을 전달했다. 다음 날인 16일에 하야시는 박제순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들여 고종에게 했던 협박과 같은 협박을 하였다. 하야시는 후일에 그 당시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드디어 약속한 바와 같이 이토오 씨가 도착하였다. 조선으로서는 이런 일은 싫고도 싫은 일이겠으나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간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이같이 하기로 했다고 그 방법을 이토오 씨에게 상의하였다. 하여간 조선정부의 각 대신들을 아침부터 공사관으로 집합시켜 그 석상에서 이 담판을 시작할 것이므로 잘 되어 갈 때는 이토오 씨의 임석을 바라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선 오전 중에 매듭을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식酒食이라도 먹으면서 어떻게든지 국왕 앞에 가서 칙재勅裁를 바라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물론 나도 따라갈 예정이다. 그리고 담판의 진행에 따라 거기에는 꼭 이토오 씨가 와 주어야 하겠다. 물론 그 경우에는 궁중에서 곧 통지가 되도록 연락해 둘 것이다.또 하나 주선할 것은 하세가와 대장에게 의뢰하여 어떤 감시를 하는 것이다. 미리 계획한 대로 내가 있는 곳으로 각 대신이 모이고, 그 대화의 내용은 조선으로서는 대단히 큰 문제이므로 물론 연석한 대신들은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 한번 철수하여 궁중에 가게 된다고 하면, 도중에서 도망가는 사람이 나올 것도 틀림이 없다. 이 염려 때문에 헌병이라도 미리 배치하여 도중에 도망하지 못하게 감시하여 주기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명목은 호위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국새이다. 나는 외부에 이른 아침부터 사람을 보내어 그 국새 보지관保持官을 감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또 한 가지는 이것도 하세가와 대장에게 의뢰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그것은 어찌 되어도 좋은 것이지만, 바야흐로 조약이 체결되어 각원 중 1인이나 2인은 자살할 자가 있으리라는 근심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나, 만일에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이것도 주의해 두도록 계획을 정하였다. 이리하여 만사를 이토오씨와 약속해 놓고 이튿날 내각 대신을 나의 관저로 소집하기로 하였다. 회의는 아침부터 열렸으나 과연 오전 중에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참집한 대신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 식사를 하였다. 과연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내각원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대사건인 때문에 드디어 국왕 앞에 가서 의견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야시는 17일 오전에 조선의 대신들을 공사 관저로 소집하여 점심을 먹어가며 오후 3시가 되도록 회의를 계속했으나 아무런 결말을 내지 못하였다. 대신들은 어전회의를 열어 각자의 의견을 상주한 후에 확답하기로 하였다. 어전회의는 11월 17일 오후 3시에 덕수궁 수옥헌潄玉軒에서 열렸다. 
 
하세가와는 궁궐을 포위하고 일본공사관과 곳곳에 경계병을 배치했으며, 착검   한 부대가 큰길을 돌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각 성문에는 기관총과 야포를 배치하여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일본군과 경찰은 궁 안에서도 착검着劍을 하였고, 누가 보아도 알 수 있게 대신들을 협박하였다.  
 
▲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 왼쪽부터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법부대신 이하영, (이하영은 을사5적신에 들어가지 않은 듯하다.) 을사늑약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은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 대신 민영기였다.
 
“귀하는 조약안에 찬동하는가?”
 
이또오는 박제순을 협박하였다.
 
“어제 하야시 공사와 회견할 때, 대략 의견을 말한 바와 같이 본 협약안에 대하여 단연코 거부하기로 한 것인데, 이를 외교담판으로 본인에게 타협하라고 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에 명령이 있다면 도리가 없다.”
“그 명령이란 어떤 의미인가? 폐하의 명령이라면 이에 복종하여 조인한다는 의견으로 해석해도 좋은가? 그렇다면 귀하는 절대적으로 협약안에 반대한다고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이 있으면 조인되는 것으로 보아 무방하리라 믿는다.”
“민 대감은 찬동하는가?”
 
다음엔 탁지부대신 민영기를 협박하였다. 
 
“본인은 어제 대사와 회견한 자리에서 의견을 진술하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하등 발언한 바가 없었으나, 대체로 협약에 대해서 반대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이토오는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에게 물었다. 
 
“그러면 다음은 어떤가?”
 
본인은 어제도 대사의 설명에 답한 바 있었으나, 지금도 생각건대, 한일 양국 사이에는 이미 의정서가 조인되어 있고, 또한 작년 7,8월경 조인된 조약도 있으니, 이로써 외교상 긴요한 것은 모두 귀국 대표자의 의견을 듣게 되어 있는데, 이제 새삼스럽게 신협약을 체결한다니, 이는 필요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것은 어제의 의견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어제의 의견에 의하면, 신협약의 체결은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것 같은데 어떤가?”
“그렇다. 한일 양국은 이미 외교에 관한 협약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새삼 이를 위반하는 행동을 한 것은 우리의 잘못으로서 마침내 귀국으로 하여금 이번의 제안을 불가피하게 한 것은 우리의 잘못으로서 마침내 귀국으로 하여금 이번의 제안을 불가피하게 한 것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스스로 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과연 그러하다면 귀하의 의견은 우선 이 안건에 동의한 것으로 보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토오가 말했다.
 
“본인은 앞서 어전회의 때 진술한 내용을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이번 일본의 요구는 대세가 그렇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종래 대한국의 외교라는 것은 변화무쌍하며 그 결과 일본은 전후 2차의 전쟁에 종사하여 많은 희생을 치루고 오늘에 있어서의 대한국의 지위를 보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 대한국의 외교로부터 일어나는 결과가 동양의 평화를 문란케 하고 대한국을 위기에 빠지게 함은 부당한 것이다. 이제 일본이 이 요구를 제출하면 부득이한 것이다.”
 
▲ 을사늑약원본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이 말했다.  
 
“그렇다면 귀하는 전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알겠다.”
“본인은 앞서의 어전회의 때, 대체로 이완용 대신의 의견에 찬동을 표하였으나, 최후로 한규설韓圭卨 참정대신으로부터 일본의 제안을 부인하는 주장을 하였으므로, 연대책임의 실을 올리기 위하여 참정대신의 의견을 방임해 둔 것이다.”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이 말했다.
 
“귀하도 별로 반대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본인은 이미 한일 간의 제휴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당사자이다. 또 이번 협약안에 대해서도 이완용 대신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이 말했다. 
  
“본인도 어전회의에서 이완용 대신의 의견에 찬동을 표시하였다.”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權重顯이 말했다. 
 
“귀하가 보는 바와 같이 여러 대신 가운데 우리의 제안에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고 한 사람은 귀하와 민영기 대신뿐이다. 그렇다면 다수결에 의하여 귀하는 이 문제를 완전히 가결한 것으로 인정하여 필요한 형식을 갖추어 재가를 받아 조인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귀하는 본 안건을 거부하고 마침내는 일본과 절교하려는 의지를 표하는가? 나는 우리 천황폐하의 사명을 받들어 이 임무에 응하고 있다. 귀하에게 우롱당하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이또오가 화를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일본 측의 일방적인 기록이므로 신뢰할만한 기록은 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