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룡산 전경(사진=남원문화원)

우리나라 사람처럼 산을 좋아하는 민족도 많지 않을 것이다. 새해에는 해돋이를 보러 산을 오른다. 계절이 바뀌면 꽃구경, 단풍구경을 하러 산으로 떠난다. 관련해서 아웃도어 시장도 지난해 매출이  6조 7천억 원에 달했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이쯤 되면 산은 한민족의 집단 무의식이 아닐까 싶다. 그 뿌리에는 국조 단군이 있다.

고려 후기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최후를 밝히지 않았다. “아사달에서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권우행 동아대학교 명예교수는 신라 문무왕이 죽은 뒤 호국대룡(護國大龍)으로 신라를 지킨 것처럼 단군이 호국신(護國神)이 됐다고 주장했다. 단군은 주몽이나 박혁거세처럼 천상으로 회귀하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는 점이 이유다. 아사달에서 산신이 된 것은 국조로서 영원히 이 민족을 돌봐야 할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전라북도 남원에는 어떠한 산이 있을까? 남원문화원은 대표적으로 교룡산(蛟龍山)과 고남산을 꼽았다.

▲ 교룡산성(사진=윤한주 기자)

먼저 교룡산은 주봉인 밀덕봉(518m)과 남쪽의 복덕봉이 같은 높이로 있다. 정상에 오르면 지리산(智異山)의 노고단(老姑壇)에서 천왕봉(天王峰)에 이르는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섬진강(蟾津江)과 남원평야의 광활한 들판이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는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한 교룡산성(3,120m)이 있다. 산기슭에서 정상까지 돌을 반듯이 깎아 쌓은 산성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산성은 백제시대에 쌓았다고 하나 문헌으로 남은 것은 아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 중인 선조 25년(1592)에 도원수 권율(權慄)이 승병장 처영(處英)에 명하여 1593년에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는데 현재 약 3km의 성벽이 남아있다.

현재 남원에 남아있는 30여 개의 산성중에서 그 형태를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교룡산 산신단(사진=남원문화원)

산성은 2명의 도인(道人)과 인연이 깊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인 독립운동가 백용성(白龍城,1864∼1940) 스님은 남원 출신이다. 스님은 14세 때 꿈속에서 부처를 친견했다. 이어 산성에 있던 덕밀암(德密庵)에서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 1824 ∼1864)는 조정의 탄압을 피해 남원 은적암에서 은거했다. 그는 이곳에서 동학의 주요 경전을 집필했다고 한다. 지금도 천도교인들의 성지순례 코스로 유명하다.

남원문화원은 이곳에 산신단(山神壇)이 있다고 밝혔다. 2차 조일전쟁(정유재란) 때 남원성전투에서 무운(武運)을 빌었던 곳이다. 조선 후기 교룡산성에 주둔한 동학군의 대제단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교룡산이라는 이름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이다.

노상준 전 남원문화원장은 “교룡산은 남원고을의 중앙이요, 삼남의 중앙부로써 오행(五行)으로 정토(正土)요, 방위색(方位色)으로 정황(正黃)이다. 그래서 교룡산을 황룡산(黃龍山)이라고 하였다.”라고 말했다.

노 원장은 “남원은 황룡인 교룡산이 행주형인 남원이란 배를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남원에 군왕이 될 사람이나 성인될 사람이 자라고 있거나 앞으로 탄생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황용(黃龍, 皇龍)은 제왕이나 성인을 상징하며 교룡은 도롱뇽이라고 하여 작고 보잘 것 없는 새끼뱀을 뜻한다.”라며 “교룡산은 군왕지지(君王之地)로 금기시했기 때문에 옛 선비들이 불충으로 생각하고 황용산을 교룡산으로 격하하여 불렀을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 고남산과 고남산성(사진=남원문화원)

이어 고남산(古南山 864.4m)이다. 주민들에 의하면 고남산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이라고도 부른다. 이성계가 고려 말에 왜구를 무찌를 때 이곳에 제단을 쌓아 제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운봉고지에 올라 산세를 두루 살펴봤다. 서쪽의 고남산이 적격하여 먼저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쓴 방목 두 쌍을 만들었다. 동쪽과 서쪽에 한 쌍씩 세우고 돌을 다듬어 천제단을 쌓고 제단위에는 간단한 주효를 약설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장군은 제복을 입고 왜구의 섬멸과 필승을 기원하는 7일 기도를 고남산 제단에서 거행했다. 이어 황산(荒山)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고남산에 오르면 이때 쌓은 석축재단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고남산은 태조봉, 고조봉, 제왕봉, 적산, 일광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대부분 이성계와 관련되어 전해진다.(계속)

■ 참고문헌

노상준, 『교룡산(蛟龍山)을 명산으로 다시 가꾸자』, 전라일보, 2008년 02월 03일
이석홍, 김현식 편,『남원의 문화유산』, 남원문화원 2013년
권우행, 「삼국유사에 나타난 죽음의 유형 연구」, 『인문과학연구. 특집호』, 동아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