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편 전라북도 남원시 만인의총(바로가기 클릭)

한국을 벗어나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끌려갔다면 우리나라가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적국(敵國)에서 도자기를 굽고 단군신사(옥산신궁)을 모신 선조들의 자료를 검토하면서 든 생각이다. 

작년에 만난 한 고등학생은 영화 ‘명량’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나라에 충성했는데, 억울하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면 차라리 일본으로 귀화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많은 돈을 받고 최고의 명예를 누렸을 텐데 말입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두고 한 말이다. 말도 안 된다고 대답하기에는 당시 조선왕조가 얼마나 무능했는지는 17살이 지적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가운데 조일전쟁은 승리를 거뒀지만 이순신 장군은 전사했다. 그런데 살아남은 왕과 신하들은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요즘 나오는 <징비록>이라는 사극에서도 그런 면을 보여준다. 역사나 드라마나 하여튼 텍스트의 주인공은 백성이 아니라 지배자다. 하지만 지금 만날 사람들의 이야기는 조선의 역사서에서 찾기 어렵다. 오히려 일본의 기록이 더 많다고 하니 아이러니다. 국조 단군을 후손 대대로 지킨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까?
 
▲ 만인의총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탑(사진=남원문화원)
 
조국을 팔아버린 배신자
 
2차 조일전쟁(정유재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으로 전세가 기울었고 일본군 또한 철퇴한다. 그러나 조선 남부에서는 일본군의 저항으로 격전이 계속됐다.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 장군이 참가한 노량해전(露粱海戰)으로 7년의 전쟁은 끝이 났다. 조선 도공이 일본에 납치된 것은 이즈음이다. 
 
이들을 기록한 『대일본사료(大日本史料)』의 「지리찬고地理纂考」에 따르면 80여 명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배가 도착한 쿠시키노(串木野)에 있다가 후에 일부는 사쓰마 번(薩摩藩)의 영주가 있는 가고시마(鹿兒島)로 옮겼다. 1603년에 나에시로가와(苗代川)로 이주됐다. 조선인들이 한곳에 모여 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인 모두를 다찌노(立野) 쪽에 두라고 하였으나 남원성이 함락될 때 왜군을 인도한 ‘가의(嘉儀)’라는 놈이 먼저 온 배로 가고시마(鹿兒島)에 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자와는 한 곳에 도저히 있을 수 없어 (쿠시키노串木野)의 시마비라(嶋平)에 있기를 청원하였다.-『묘대천정류(苗代川留帳)』
 
나에시로가와(苗代川)의 도공 심당길의 후손인 14대 심수관 씨의 회고록은 더 구체적이다.
 
시마즈코우(島津公)으로부터 가고시마의 성 아래로 이주하라는 온정을 넌지시 비췄을 때에 “후정에는 감사할 수밖에 없지만 알기 쉽게 말씀드려서 가고시마의 성 아래에는 이미 조선에 원정하셨을 때에 조선인이면서 조국을 팔아 일본군의 인도자가 되어 활약했던 자(者)가 현재 무사(=사무라이)로서 감싸주셔서 때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도진공에게 모반할 뜻은 전혀 없습니다만 실은 저희들로서는 일본에 도래하기로 결정된 날부터 이런 자들과는 함께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결의를 굳게 하였기 때문에 성 아래로 이주하는 것은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은 일본에 건너온 이래로 끊겨서 조상에게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있사오니 원하옵기는 조국으로 가는 길인 ‘바다’가 보이는 장소에, 저희들만으로 한 읍을 쌓을 수 있는 토지를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 드려서 도진공의 허락을 받아 불편한 나에시로가와(苗代川)를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정 광 고려대학교 교수는 “조선인들이 가고시마에 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회를 봐서 조국에 돌아가겠다는 귀국에 대한 강한 의지와 남원성이 낙성(落城)되는 데 도와준 매국노와는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애국심이 동시에 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국조를 모시다
 
처음에는 벌판에 그대로 방치됐다. 이들은 간단한 농업을 하고, 도자기를 구워 생활했다. 6년 후 사쓰마 번의 영주는 이들에게 나에시로가와로 옮기게 하여 집도 24개를 지어 살게 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점이다. 옷차림과 생활풍속을 그대로 유지했다. 사쓰마 번의 영주가 지나갈 때는 조선 춤을 보여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국조를 모신 옥산궁(玉山宮, 혹은 옥산묘玉山廟)을 건립한 점이다. <옥산궁유래기(玉山宮由來記)>는 “옥산궁은 모두 조선의 개조인 단군의 사당이다. 평양 옥산에 신주를 모신 큰 사당이 지극히 훌륭하고 아름다웠다.(玉山宮ハ蓋シ朝鮮開祖檀君之廟也。平壤玉山に神主ヲ設テ大社善美ヲ盡ス)”라고 밝혔다. 옥산궁이 곧 단군묘인 것이다.
 
이에 대해 설명이 더 필요하다. 조선은 유교국가로 알려졌지만 단군전을 건립했고 왕이 직접 제사를 거행했다.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함께 모셨다. 1425년(세종7) 사온서 주부(司醞署注簿) 정척(鄭陟)은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으로 해서 제사를 받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논의 끝에 1429년(세종 11) 평양의 기자묘 남쪽에 단군묘를 건립했다. 이어 세조는 1460년 10월에 단군사당에서 친제를 거행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강동현의 고적으로 단군묘가 있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일본 옥산궁 또한 단군문화의 소중한 유산임을 알 수가 있다. 
 
조선인들은 옥산궁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 조선의 춤, 노래들을 불렀다. 떡과 과일을 만들어 서로 나누어 먹었다. 이웃에 싸서 보내는 등 고향의 예절을 잊지 않았다. 
 
장기웅 조선대학교 국문학 박사는 “단군신사 건립은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보다 200년 뒤의 일이다. 그것도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간 조선인들이 적지에 세운 사당이다. 그때까지 국조로서의 단군의 신위가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의지였던 것이다. 오늘날 단군신앙을 미신으로 몰아붙이는 사회일각의 세태 풍조와는 사뭇 다른 격세지감이 있다.”라고 말했다.
 
▲ 단군을 모신 옥산신사와 비석이다.(제공=석필 출판사)
 
실향민의 노래
 
한편 만인의총 입구 왼쪽에 자리한 노래탑은 1995년 남원문화원이 세운 것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고향에서 불렀던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새겼다. 지난 1988년 7월 26일 광한루원 완월정에서 남원의 도공 후예들이 불렀던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 귀향음악회를 통해 고향 남원에 되돌려주는 전수식이 계기가 됐다. 노래탑에 새겨진 ‘오늘이 오늘이소서’는 신관이 옥산묘에서 제사를 올리면서 부른 것이다. 
 
“오늘이라 오늘이 왔다. 제물도 차렸다. 오늘이 오늘이구나 모두 함께 노세. 이리도 노세 저리도 노세. 제일이라 제일이라. 우리 어버이. 조신(祖神)을 잊지 않으리라. 고수레 고수레 자나 깨나 잊지 않으리.”
 
이 노래는 1610년 남원에 살았던 양덕수(梁德壽)가 펴낸 <양금신보 梁琴新譜>에도 실려 있다.
 
이들은 실향민이다. 한국전쟁 이후 이산가족은 반세기가 넘도록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했다. 일부는 생을 마감했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에서 그 통한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물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에서 묻힌 조선인의 역사가 400년이 넘었다. 
 
조일전쟁에서 수도를 버리고 신의주까지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온 선조 임금과 신하들은 이들을 기억할까? 
 
옥체(玉體: 임금의 신체)를 보존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중요하다는 지도층과 단군의 자손임을 잃지 않은 조선의 도공 사이에는 인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계속)

■ 만인의총

누구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636번지(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이석홍, 김현식 편,『남원의 문화유산』, 남원문화원 2013년

박성수, 『단군문화기행』, 석필 2009년

신종원외, 『한국 신을 모시는 일본의 신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년

장기웅, 『단군전승의 비교신화학적 연구』,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논문 2003년

정 광, 「일본 재소 한국학 자료의 현황과 활용방안-苗代川 자료를 중심으로」, 『제1회 한국학포럼』,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