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머니들은 새벽이면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우리나라 고유의 가정신앙이었다. 이후 기도대상은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붓다, 공자, 예수, 성모마리아로 바뀌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의 기도는 지금도 계속된다. 수능을 앞두고 어머니들이 100일 기도에 들어가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를 검색하는 IT 시대에도 바뀌지 않는 것은 한민족의 신앙 DNA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신앙대상으로 삼은 것은 무엇일까? 김승혜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는 “한국인의 신앙구조는 푸른 창공을 지칭하는 ‘하늘’에다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말인 ‘님’자를 붙인 ‘하느님’, 즉 천신(天神)을 신앙의 최고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하느님께 제물을 차리고 강원도 태백산이나 강화도 마리산 등에서 올리는 것은 천신제(天神祭)가 된다.

이러한 제천문화는 단군조선을 시작으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신라의 신궁제사(神宮祭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로 계승됐다. 이때까지는 나라가 주관했다. 그러나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하고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천제문화는 끊긴다. 성황당(城隍堂)이나 동제(洞祭)라는 민간신앙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는 “조선왕실은 선도 제천의례를 음사(淫祀)로 배척했다. 국중대회 형태의 대규모 제천의례를 폐지했으며 산천과 신사(성황)에서 치러진 크고 작은 형태의 각종 제천의례는 유교식 지제로 억압됐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제천의례의 이해를 바탕으로 남원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꼽히는 ‘남원주당산제(南原主堂山祭)’를 살펴보자.

▲ 남원주당산제(사진=남원문화원)

노상준 전 남원문화원장은 “조선 시대에는 남원 수령인 부사(府使)가 제관으로 참여했다”라며 “한말 이후 맥이 끊어진 것을 1991년에 남원문화원에서 복원했다. 문화의 달인 매년 10월 중에 열고 있다”라고 말했다.

순서는 제의 시작을 알리고 신을 맞아들이는 매굿과 유교식 제례, 무녀와 공인이 열두거리 굿으로 진행한다. 제례가 끝나면 신을 보내는 굿으로 마무리된다. 다음은 축문이다.

해를 이르러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누구는 감히 고하나이다.
천황대제 당산지황제 인황대제 높으신
삼위영존을 제단에 모시오니 삼가 내리십시오.
때는 계절의 기운이 바뀌어 찬 서리가 내리고
나무나 풀뿌리는 땅으로 내리는데
마음과 몸을 닦아 공경한 마음으로
영위전에 엎드려 비옵나이다.
높으신 영신께서 미물의 인간을 편안케 하시고
해마다 평화롭고 무탈하며
부귀영달과 건강함을 주시어
향리 만세에 큰 복을 내리시어 높이 향을 받들어
제를 올리옵고
삼가 맑은 술과 포혜를 천신하오니
흡향하소서

노 원장은 “남원 당산제는 천제단에서 천제를 모신다고 해야 맞다. 당산제라는 명칭으로 격하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라며 “지금까지 당산제의 명칭으로 삼신대령제(三神大靈祭)를 모신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당산제가 민간신앙으로 격하된 것은 앞서 소개했다. 주목되는 것은 제의 대상이 삼신(三神)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제천의 기본원리는 삼신신앙(三神信仰)이다. 환인이 환웅을 지상에 내려 보내어 웅녀와 결합하게 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술은 삼신신앙의 원형을 간결하게 서사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신대령은 삼신신앙의 변형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 박 교수는 당산이란 호칭은 후대에 생긴 이름이라고 했다.

“대마도에서는 당산을 단산(壇山)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이름이 제천의식의 원형에 가까운 이름이다. 왜냐하면 제단에서 거행되는 것이 제천의식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제천을 당집에서 거행하는 것은 훨씬 뒤에 생긴 발전된 형태였다.”

▲ 남원석돈(사진=남원문화원)

한편 당산제를 지내는 제단은 남원석돈(南原石墩,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8호)이다. 남원우체국 내에 있는 단모양의 당산이다. 화강석을 이용하여 기단(基壇)을 쌓고 그 위로 흙을 쌓아 느티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기단석은 80×40cm의 장방형을 돌로 쌓았다. 조성연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모습은 1986년 우체국을 신축할 때 당산이 훼손 될 위기에 처하자 이만기, 양창현, 노상준 등의 지역 원로들이 정보통신부에 당산 보존의 당위성을 진정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 관리되고 있다. 남원의 구지(舊誌)인 『용성지(龍城誌)』에 의하면 성을 수호하는 당산신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북문을 지키는 당산이라 하였다.

노 원장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용성관(龍城館) 후면에 아주 큰 돌무덤이 있어 이를 석돈(石墩)이라 하였는데, 석돈 위에는 수풀이 무성하고 고목이 우거져 때로는 두견새가 날아와 깃들이고 철 따라 두루미도 찾아오곤 하였다. 그 위치는 용성관 뒤편과 부성 내 7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석돈의 돌은 석재로 사용하고 흙은 골라 평지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시내가 위축되고 시내에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라고 설명했다.(계속)

■ 남원석돈

전라북도 남원시 하정동 189번지(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이석홍, 김현식 편,『남원의 문화유산』, 남원문화원 2013년
국학연구원,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박성수, 『단군문화기행』, 석필 2009년
김승혜, 「한국인의 하느님 개념」『종교신학연구』 Vol.8 No.1 서강대학교 비교사상연구원 199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