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조일전쟁(정유재란)에서 민관군 1만여명은 남원성에서 일본군과 싸워 모두 순절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만인의총이다. 사진은 만인의총 전경(사진=남원문화원)

남원성 전투의 패배, 명 장수의 오판
만인의총 국가관리 논란…문화재청의 회신

‘아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책에 남긴 것이다. 지난 20일 전라북도 남원시를 다녀오고 이 말이 새삼 떠올랐다.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의 차로 동행하며 “남원의 문화유산을 보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라고 말하니, “하루 만에 보려고 왔느냐? 일주일을 봐도 모자란다”라고 답했다. 과연 그랬다. 남원은 전국 지자체 중에서 가장 많은 역사문화유적을 보유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 116건(국가 38건, 전북도 78건), 비지정 문화재 161건 등 277건에 달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1월 전국 최초로 문화도시로 선정한 이유를 알겠다.

- 어디를 먼저 가고 싶습니까?
“만인의총부터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곳부터 참배하고 단군성전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김 국장은 약간 놀라는 표정이었다. 지난 18일에 방문한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만인의총을 처음으로 찾지 않았다고 했다. 김 국장은 순서상으로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나 청장이 어떠한 이유로 그랬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대통령이 현충원 참배로 첫 일정을 시작하듯이, 나 또한 남원에 왔다는 것을 심고(心告: 마음으로 고함)하기 위해 만인의총을 잡은 것이다. 후손을 위해 1만 명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잃은 역사의 성지가 아닌가?

▲ 만인의총 충의문(사진=윤한주 기자)

조일전쟁의 비극

남원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만인의총. 입구서 홍살문, 충의문, 성인문을 지나 충렬사에 도착했다. 향을 피우고 고개 숙여 참배했다. 이어 뒤편에 자리한 의총 앞에서도 참배했다. 400여 년 전의 역사가 어제처럼 느껴졌다.

1597년 1차 조일전쟁(임진왜란)에 이어 2차 조일전쟁(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일본은 좌군과 수군 5만여 병력으로 남원을 공격했다.

당시 조선왕조의 대책은 명나라 구원병 양위옌(楊元)을 남원에 보낸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명나라 병사 3천 명과 조선군 1,300여 명 등 4,300여 명이 성을 지켰다.

8월 13일, 일본군은 남원성을 공격했다. 이에 동문은 양위옌, 남문은 지앙삐야오, 서문은 마오 청시엔, 북문은 이복남 장군이 방어했다. 14∼15일, 이틀 동안 싸웠다. 다음날 성은 함락됐다. 양위옌은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포위망을 뚫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꽁무니를 빼는 왕과 장수가 있는 한 전쟁에서 이기는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 만인의총 성인문(사진=윤한주 기자)

남원성 전투는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김 국장은 당시 명나라의 전략 실책을 지적했다.

“교령산성이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거기를 놔두고 남원성에서 전쟁을 치르자고 한 것은 명이었습니다. 기마병(騎馬兵)이었기에 평지에서 싸우려고 했던 것이죠.”

조선군은 운봉, 진안, 장수, 임실, 곡성, 구례 등과 남원성의 곡식을 모두 교룡산성으로 옮기고 방어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양위옌이 남원에 온 후 자체적으로 수립한 계획을 무시하고 교룡산성을 파괴한다. 군대가 기마병이라 평지인 남원성을 중심으로 방어계획을 바꾼 것. 양위옌은 남원성 밑의 해자를 파고 성벽을 높여 대포 27문을 설치하는 등 남원성을 개축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명나라 구원병 3천 명과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이 이끈 조선 병사 1천여 명 그리고 백성 6천여 명이 모두 순절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남원성에서 코 베기를 자행했다. 일본으로 보내진 코들을 한데 모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미미즈카(耳塚: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바뀌었다)라 하여 교토에 지금도 남아있다. 또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도공(陶工)을 비롯한 기술자들을 끌고 갔다. 백성은 포로로 잡아가 포르투갈 등에 당시 돈 2원을 받고 노예로 파는 만행을 저질렀다.

▲ 왼쪽은 일본군의 작전지도다. 2차 조일전쟁(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 사용한 것으로 가와가미 후사구니(川上久國)가 그린 것이다. 크기는 가로 90cm, 세로 68cm로 남원 성내의 건물과 통로, 성문과 성벽 등은 물론 어느 장수가 어느 지점에 몇 명의 병력으로 포진하고 있는가 등 병력 배치 상황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또 성안의 '+'자형 통로 중앙 교차 지점에는 대장 양원(大將 楊元)이라고 써 있다. 오른쪽은 남원읍성이다.(사진=남원문화원 제공)

일본의 종군 승려 경념(慶念)은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서 “성안의 사람은 남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 버려 살아있는 동물이란 하나도 없다. 비참할 뿐이다. 인간이란 모두 죽어 엎드려 있을 뿐이다”라고 그날의 참상을 기록했다.

반면 <선조실록>은 “남원 주변의 주민과 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 참전하여 용감히 싸워 많은 일본군(왜군)을 죽여 충절을 다했다”라고 밝혔다.

국가관리 칠백의총 vs 도관리 만인의총

전쟁이 끝났다. 1612년 시신을 거두어 한곳에 묻고 넋을 기리기 위해 충열사(忠烈詞)가 건립됐다. 사당 중안에 ‘남원부성순절만인지위(南原府城殉節萬人之位)’란 위패와 좌우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52명의 위패를 모셨다. 1675년(숙종 원년)에 남원역 뒤로 이전한 후 1879년(고종16) 사우가 철폐되어 단을 설치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왔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허술한 묘역을 보고 이장을 검토해 현재의 자리로 오게 된 것이다. 국가문화재 사적 272호로 지정됐다.

▲ 만인의총 충렬사(사진=윤한주 기자)

하지만 ‘만인의총’에 대한 남원시민의 아쉬움은 크다. 충청남도 금산군 칠백의총(七百義塚)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데 반해 만인의총은 도 관리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칠백의총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워서 순절한 700의사의 무덤이다. 순절을 숫자로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1만 명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남원시민은 만인의총이 국가관리로 승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를 요구하는 시민단체 측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분과 계층을 넘어 민·관·군이 하나가 되어 위기를 극복하려는 만인정신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적 자산으로 남북은 물론 동서가 분열된 상황에서 국가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숭고한 정신이다. 하지만 만인정신의 국가정신 승화와 계승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코리안스피릿은 문화재청에 질의서를 보냈다.

- 만인의총은 국가에서 관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많은 문화재를 국가에서 관리하기는 어렵다. 문화재청은 지방조직이 없어서 4대궁, 종묘․사직, 조선왕릉, 현충사, 칠백의총, 숭례문 등에 한해 관리하고 있다. 그 외 지방자치단체 등을 관리단체로 지정해서 관리하고 있다.”

- 문화재 국가 관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국유(國有) 문화재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관리한다. 만인의총은 대부분 전라북도 소유로서 공유문화재이다. 칠백의총을 비롯해서 유사 문화재와의 형평성과 전라북도민, 유족 등의 여론을 고려해 전라북도에서 국가관리를 요청하면 만인의총을 문화재청으로 이전하는 방안은 관계부처와 적극 협의해나갈 계획이다.”

▲ 만인의총(사진=윤한주 기자)

한편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은 고향을 잊지 못해 단군사당을 지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매년 남원성이 함락된 8월 16일에 제례를 올리고 고향에서 부르던 ‘오늘이 오늘이소서’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기념비가 만인의총 입구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 사연을 알아본다. (계속)

■ 만인의총

매년 9월 26일 제향을 올린다. 누구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636번지(바로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