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부안의 돌장승과 돌솟대는 자그마치 2,000년 이상의 전통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로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장승과 솟대는 마을의 수호신 이전에 단군문화의 유산이라는 점이다.

솟대의 새, 신조(神鳥)

당산은 2곳이다. 먼저 동중리에 있는 동문안당산은 부안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문안삼거리 방면으로 20분 정도 걸으면 된다.

▲ 부안군 동문안당산의 돌장승이다. 왼쪽부터 ‘상원주장군’이라고 몸체에 새겨진 남장승, ‘하원당장군’이라고 새겨진 여장승(사진=윤한주 기자)

돌장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제주의 돌하르방과 닮은 장승의 해학스러운 표정이 재밌다. ‘상원주장군’이라고 몸체에 새겨진 남장승은 머리에 벙거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반면 ‘하원당장군’이라고 새겨진 여장승은 동중리와 선은리(仙隱里)의 경계 지점에 당산목(堂山木)과 함께 있다. 남장승보다 키가 크지만 모자는 쓰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돌장승을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른다. 마을의 수호신을 조부모처럼 친근하게 모시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어 부안군청을 지나서 10분 정도 걸으면 서외리에 서문안당산이 나온다. 이곳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산으로 나뉜다. 할아버지 당산은 화강암으로 된 반석 ·돌기둥 ·돌새 등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주신(主神)이다. 할머니 당산은 화강암의 반석과 돌기둥의 2부분으로 되어 있다.

특히 높이 3m20cm의 화강암 기둥 위의 한 마리 오리가 눈에 띤다. 솟대는 신간(神杆)이라고도 하니, 새는 신조(神鳥)임이 분명하다.

역사학자 최남선은 “신간은 고대에는 불함문화계의 공통의 영표(靈標: 신령스런 표지)”라며 “향촌(시골마을)에는 제액신(除厄神: 액을 제거하는 신령)으로 조각한 신조(神鳥)를 끝에 얹은 신간을 상시에도 뜰 안에 세워두는 풍습이 있다”라고 말했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새끼를 꼬아 만든 동아줄로 줄다리기 한 다음 그 줄을 돌기둥에 감아 놓은 후 제를 올린다. 동아줄을 돌기둥에 감는 것을 ‘옷입힌다’고 하는데 돌기둥이 동제의 주신으로 받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도의 기원은?

앞서 유홍준 교수가 솟대와 장승에 대해 2,000년의 역사를 말한 것은 유물과 문헌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된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이다. 최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1823호)로 지정됐다. 한 면에 따비 같은 농기구로 밭을 가는 남성과 추수하는 여성을 표현하고, 반대편에는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은 모습을 새긴 청동의기(靑銅儀器)로 분류된다. 나뭇가지 위의 새는 솟대로 본다. 후자는 고대 중국의 기록이다.

▲ 부안군 서문안당산이다. (사진=윤한주 기자)

“나라의 고을마다 각자 한 사람을 세워서 천신(天神: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고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특별한 구역이 있는데 그것을 ‘소도’라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기는데 그 안으로 도망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않았으므로 다들 도적질을 즐겼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취지는 부도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행하는 일에는 선악의 차이가 있었다. - <삼국지> 동이전(東夷傳) ‘한’(韓)조”

국학자 정인보는 “도적 우두머리라도 되는 것처럼 적고 있지만 그것은 조선의 실정을 잘 몰라서 멋대로 한 말일 뿐”이라며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절대로 당사자를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두레’에 ‘금줄’이 쳐 있어서 도망자가 들어가더라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는 관리가 함부로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어 “금줄, 즉 금역 안에서 도망자를 체포한다는 것은 성스러운 제사 예법을 어기는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내현 단국대학교 명예교수는 한의 천신, 소도, 천군 등은 고조선의 종교를 계승했다고 밝혔다.

“고조선은 하느님을 최고신으로 섬겼다. 그리고 태백산 꼭대기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신단이 있었고 그곳에는 신단수가 있었다. 부여, 고구려, 동예 등에서도 고조선처럼 하느님을 섬겼는데 한에서 최고신을 하느님을 섬긴 점이라든가 고조선의 신군과 같이 한에도 종교를 주관하는 천군이 있다는 점, 고조선에 신단이 있었듯이 한에는 소도가 있었다는 점, 고조선에 신단수가 있었듯이 한에는 방울과 북을 매단 큰 나무가 있었다는 점 등은 고조선과 한의 종교가 그 숭배 대상이나 숭배 방법에 있어서 매우 비슷했음을 알게 해준다.”

한편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일본 신사의 입구에 세워진 문, ‘도리이(鳥居)’가 솟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옛날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이주민들에 의해 이식한 솟대가 도리이로 개조된 것. 도리이의 원조(元祖)가 한국이라면 문화수출국으로서 자긍심을 가질만하다. 그런데 일본은 어디를 가나 8만여 신사와 도리이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한국은 새마을운동을 한다고 솟대, 장승 등의 귀중한 문화재를 파괴했으니, 그러한 조상을 둔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이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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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1994년
조법종, 고조선 고구려사연구, 신서원, 2006년
박성수, 단군문화기행, 석필, 2009년
최남선, 불함문화론, 우리역사연구재단, 2008년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2, 창비 2011년
정인보, 조선사연구, 우리역사연구재단,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