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의 석학이자 한국선도의 비조(鼻祖)로 유명하다. 그는 <난랑비서문>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 가르침을 베푼 근원이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다"라고 밝혔다.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은 외래종교가 이 땅에 수입되기 이전에 우리나라 고유의 도(道)가 있었다는 것. 최치원은 풍류도(風流道)라고 했지만 윤내현 단국대학교 명예교수는 “신라 풍류도의 기원이『선사(仙史)』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했으니 풍류도의 원명은 선도(仙道)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법이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도의 역사를 담은 책, 『선사(仙史)』가 오늘날까지 전해졌다면 『삼국사기』와『삼국유사』만을 고대의 역사서로 인정하는 실증주의 학자의 인식을 넓혀주었으리라.

▲ 군산 옥구향교 내 문창서원 최치원 영정(사진=윤한주 기자)

역사적 진실 vs 생각의 진실

지난달 11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단군문화를 취재하면서 흥미로운 주장을 듣게 됐다. 최치원의 고향이 경주가 아니라는 것.『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경주라고 적혀 있는 데 무슨 소리냐? 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두 사서는 고려시대에 집필된 것.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최치원의 고향이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교인 계원필경』에서 "공(公)의 이름은 치원이요, 자는 해부(海夫)요. 고운(孤雲)은 호이니, 호남 옥구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조선후기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은『삼현사중수기』에서 "삼현사는 옥구에 있다……. 문창후(=최치원)가 여기서 태어났고 충익공과 충민공이 서로 이어 이곳의 수령이 되었으니 고을인사들이 끊임없이 이들을 추모한다"라고 했다.

시대에 따라서 바뀌는 것은 최치원의 출생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최치원이 경주 사령부 사람이라고 했지만 ‘기록이 소멸되어 그 가계의 계통을 알 수 없다'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런데 군산 옥구의 해안과 섬들을 중심으로 최치원 관련하여 전설과 유적이 많다.

김중규 군산시청 학예사는 “최치원이 군산 지역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고려시대에는 그의 시호를 따서 문창현이 생겨났다. 예부터 최치원 출생에 관련된 선유도와 내초도 전설이 있었다. 옥구군의 군지에도 최치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과거 서해안에 자리한 정자였던 자천대의 내력에도 최치원이 등장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치원 문화유산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경주의 상서장과 독서당, 마산의 월영대와 고운대, 부산 해운대, 함양의 상림과 학사루, 서산의 부성사, 서천의 도충사, 광주의 지산영당 등이 있다.

김성환 군산대학교 교수는 “최치원의 출생지를 분명하게 증명하기는 어렵다. 천여 년전의 일인데다 사료마저 부족해 사실을 판가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역사의 진실 차원에서 최치원의 출생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문화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 일대의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믿어온 생각의 진실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신라 말에 최치원이 태인에 태수로 재직했고 이 지역 사람들의 믿음처럼 그가 고군산 출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 한중교류가 빈번했던 해양문화의 특성, 백제의 옛 땅이었던 지역민들이 신라 골품사회 비주류의 문화영웅이었던 최치원을 바라보던 시선 등이 겹쳐 고군산의 최치원이 문화적으로 재창조되었다. 고군산의 경이로운 절경이 신선 최치원의 이미지와 결합한 점도 인정된다.”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최치원의 군산 탄생설은 지역의 문화콘텐츠로서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 군산 옥구향교 내 자천대. 신라의 석학 최치원이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원래는 군산 비행장이 있던 선연리 하제의 서해안 바닷가에 있었다.(사진=군산시청)

옥구향교의 자천대

군산에서 대표적인 최치원의 문화유적으로 자천대를 꼽는다. 현재 옥구군 상평읍 옥구향교에 옮겨졌지만 본래는 군산 비행장이 있던 선연리 하제의 서해안 바닷가에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자천대(紫遷臺)는 서해안에 있다. 지세가 평평하고 넓으며, 샘과 돌이 가히 사랑할만하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최치원이 놀던 곳이라 한다"라고 밝혔다.

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피의 서쪽은 옥구로, 서해안에 닿아있으며 자천대가 있었다. 작은 산기슭 한 줄기가 바닷가로 뻗어 들어가는데 그 위에 두개의 돌함이 있었다. 신라 때 최고운이 태수가 되어 함 속에 비밀문서를 감춰두었다고 한다."라고 했다. 최치원이 노닐던 정자이자 비서(秘書)가 있는 것이 자천대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대일항쟁기 군용비행장이 생기면서 자천대는 훼손될 위기에 처한다. 당시 군수였던 최학수를 중심으로 자천대를 모처로 이전하고 그 뒤 누대가 황폐해진 것을 1967년 옥구향교로 옮겨 중건하게 된다. 당시 옥구향교 유생들과 고형곤 의원(전 전북대 총장)의 주도로 이뤄졌다. 김제 출신 김상기 전 서울대 사학과 교수가 비문을 썼다. 원주형의 초석을 사용해서 지은 2층 누각이다. 2층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대었다. 원 주위에 가구(架構)된 공포는 주심포와 익공식의 절충식으로 곱게 단청되어 있다.

한편 자천대 근처에는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문창서원(文昌書院)이 있다. 제사는 10월 3일 개천절에서 단군제례와 함께 지낸다고 한다. 이 옥구향교에서 단군전을 건립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하겠다.(계속)

■ 군산 옥구향교(바로가기 클릭)
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626

■ 참고문헌

윤내현,『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4년
김성환, 「고군산의 최치원 문화원형 연구」, 『인문콘텐츠 제14호』, 인문콘텐츠학회 2009년
김중규, 『군산역사이야기』, 안과밖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