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자 갑자기 몰아친 한파에 모두 움츠려 든다. 그러나 서기 1636년 12월은 우리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이 있었다. 병자호란이 발발 하여 근세조선의 518년 역사상 초유로 왕이 항복을 하였기 때문이다. 1598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ㆍ 무명의 생령이 스러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불과 38년 만에 또 다시 휘몰아쳐온 경천동지의 국난이었다. 7년의 임진왜란에 조선은 초토화되었으나 결국 승리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완전히 달랐다. 단 48일 만에 조선의 ‘인조仁祖’는 적장 ‘청淸 태종太宗 홍타시’에게 삼전도三田渡 (현, 서울 송파구)의 얼음 밭에 꿇어 엎드려 천자에게 바치는 큰 절을 올리며 항복을 간청하였다. 이후 근세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길 즈음해서야 비로소 가혹한 청나라의 질곡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나라를 잃고 기나긴 일제의 수탈을 견뎌야만 했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6.25 동란의 참극에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636년 봄, 청 태종은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淸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중원대륙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는 그는 명나라를 사대하는 조선을 늘 ‘후방의 적’으로 여겼다. 1627년, 온갖 트집 끝에 정묘호란을 일으켜 형제 국으로서 조약을 맺고 ‘형이 되어 너그럽게’ 물러갔다. 9년 후 1636년, 북경 근처까지 진격해 들어간 청나라는 명나라와 ‘사활을 건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청 태종은 명나라와 ‘건곤일척’을 벌이는 사이에 등 뒤에서 닥칠 조선의 공격이 두려웠다. 조선은 일본에게 거의 멸망할 나라를 다시 세워준 ‘재조지은 再造之恩’ 을 내세우며 한사코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섬기기 때문이었다. 청 태종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고치려 했다.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조선은 들어 줄 수가 없었고 결국 병자호란을 당한 것이다. 유난히 추웠던 병자년 겨울,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은 척화파와 주화파의 목숨을 건 갈등이 지루하게 이어지더니 결국 항복문서가 오가게 되었다. 문서가 몇 번씩이고 오가며 다듬어지는 사이, 성안의 군사와 백성들은 얼어 죽고 굶어 죽어 무수히 시구문으로 버려진다. 성 밖의 백성들은 청군의 사냥감이 되어가고 있었다. 청 태종은 궁지에 몰린 조선의 국왕 인조를 겁박하며 꾸짖는다. “정묘년의 치욕을 갚겠다면서 왜 섬으로 숨느냐? 너희를 쳐서 명나라가 어찌 하나 보겠다. 이 조그만 성을 취하지 못한다면 짐이 장차 어떻게 중국 본토로 내려갈 수 있겠느냐?”, “네게(조선 국왕) 성을 나오기를 명하여 짐을 만나보게 하는 것은, 첫째는 네가 성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복종함을 보고자 함이요, 둘째는 네게 은혜를 베풀어 다시 나라를 다스리게 한 다음 군사를 돌이켜서 나중에 인仁과 신信을 천하에 보이고자 함이다.”
강력하게 몰아치는 청 태종의 협박에 대한 인조의 대답 또한 오고간다.
“명나라는 우리와는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항복하면 정말 살려주시는 겁니까? (청나라)황제 폐하가 용서하셔도 조선 백성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저의 피맺힌 정성을 보아서라도 살려 주십시오.”
결국 인조는 1월 30일 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의 의식을 행한다. 조선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청군은 명나라의 공격을 대비하여 급히 회군한다. 병자호란은 전광석화 같이 끝을 맺지만 몽골군에 잡혀간 포로는 차치하고도 청나라의 포로로 ‘60만 명’의 조선백성이 끌려간다. 한사람도 우리의 조상이 아닌 분이 없다.
당시 조선은 ‘서애 유성룡’도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오랫동안 조선에 의탁해 살아온 자식”이라고 할 정도로 상하가 여진족을 ‘변방의 오랑캐’로 경멸해왔다. 여진족의 추장 ‘퉁밍거티무르(童猛哥帖木兒)’가 1,395년과 1,404년 두 번에 걸쳐 태조 이성계와 태종에게 조공을 바치러 한양을 다녀간다. 조선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하여 ‘오도리 상만호上萬戶’라는 직책을 주었다. ‘퉁밍거티무르’는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태종의 직계 조상이다.
조선은 후일의 청나라를 ‘아들’에서 ‘신하’로 밑에 두다가 오히려 ‘형님’으로 모시다가, 돌연 생사여탈권을 빼앗기고는 ‘신하’가 된 것이다. 불과 214년 만의 일이다.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을까? 이 참혹함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역사는 되풀이 된다.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으로 우리는 어떠한 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
사)국학원 원장 (대), 전국민족단체 협의회 대표회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