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갈등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떻게 역사갈등을 해결했을까?

이에 대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세계 각국의 역사논쟁–갈등과 조정>이라는 주제로 오는 13일 박물관 6층 강당에서 개관 1주년 기념으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회의에서 주요 국가의 역사와 정치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본다. 오전에는 독일과 폴란드 역사박물관 관장이 각 박물관 건립과 운영 경험에 관해 발표한다. 오후에는 독일, 프랑스, 스페인, 미국, 영국, 일본 6개국의 역사와 정치 논쟁에 관해 발표하고 토론한다.

송충기 공주대 교수(서양사)는 1960-1970년대 독일연방의회에서의 나치범죄 시효 논쟁을 다룬다.

독일은 1965년 나치범죄의 시효 종료를 앞두고 시효 연장 주장과 반대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시효를 연장하면 수많은 경범죄자의 처벌에 따른 저항, 혼란이 우려됐다. 그러나 1968년 중죄와 경범죄의 시효를 구분하도록 형사법이 개정되어 나치 연루자 중 경범죄자의 시효가 자동 종료되자, 독일 의회는 살인범죄자(학살자)의 시효를 10년 연장한 후 아예 폐지(=무기한 연장)함으로써, 나치 중범죄자를 큰 사회적 갈등 없이 처벌할 수 있었다.

송 교수는 "타협을 통한 청산 대상의 최소화가 성공적인 과거사 청산에 크게 이바지했다”라며 “그 과정에서 정치권이 큰 역할을 했다."라고 말했다.

권윤경 서울대 외래교수(서양사)는 프랑스의 비시정권 기억에 관한 논쟁을 밝힌다.

제 2차대전 후 프랑스는 프랑스 민족의 영웅적 투쟁과 자기해방의 서사 외에 다른 기억은 은폐됐다. 그러나 1970년경부터 프랑스인의 나치 협력, 반유대주의, 학살 공범이 폭로되고 관련자가 처벌됐다. 1997년 이후에는 식민주의, 특히 알제리 전쟁기의 고문과 학살이 기억의 공론장에 등장했다.

권 교수는 "전후 1970년경까지의 프랑스처럼 공론장에서의 논의나 합의 없이 국가가 진행하는 위로부터의 기억 사업은 오히려 사회 통합보다는 분열을 촉발한다"라며 "집단 내부의 논리에 따르는 기억이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를 잠식하면 폭력적인 대립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황보영조 경북대 교수(서양사)는 스페인의 과거사 논쟁을 발표한다. 1939년~ 1943년 스페인 내정과 프랑코 정권이 설치한 감옥, 강제수용소, 강제노동대에서 처형된 희생자들은 58만 명에 달한다. 프랑코가 죽은 후 스페인은 평화를 위해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기(침묵협정)로 했다.

황 교수는 "전환시대의 논리로 떠오른 침묵은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었고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침묵도 결국 과거사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최근 들어 과거사 문제가 다시 불거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지적했다.

정경희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서양사)은 미국 역사표준서 논쟁을 다룬다.

1990년대 전반 학교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한 역사표준서 개발 작업을 진보적 역사학계가 맡은 결과, 역사표준서가 여성, 노동계급,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소수에 과도하게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

표준서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미국의 건국이념, 건국가치에 소홀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상원이 역사표준서를 비판하는 결의안을 99 대 1로 통과시킴으로써 결국 표준서가 수정되기에 이르렀다. 정 위원은 이를 정치권이 갈등을 조정 해소하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한 좋은 예로 평가했다.

한편,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와 진창수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정치학)은 각기 영국과 일본의 국가 정책 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다룬다.

영국은 노동당과 보수당이 각기 집권당으로서 복지국가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다. 각기 야당 시절 집권당 정책의 성과를 인정하고 그를 수용하여 자신의 정강정책을 바꾸었다. 이것이 영국정치의 특징인 합의(合意) 정치, ‘구심(求心)적 경쟁’이다. 물론 정당 내에서 이러한 노선 변경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특히 대처 집권기에 노동당은 한때 극단적 이념 노선을 추구하기도 했으나 그 결과는 국민의 외면뿐이었다. 이후 상대당의 노선을 대폭 수용하는 합의 정치로 회귀했다.

강 교수는 원심적 경쟁과 분열 정치가 두드러지는 한국 정치에 대해 ‘시대 흐름, 시대 과제에 대한 정파간 합의’만 있어도 한국 정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진창수 연구위원은 일본 평화헌법을 둘러싼 논의를 밝힌다. 제2차대전 패전 후 일본 정부가 미국에 안보를 맡긴 경제중심주의 노선의 평화헌법을 택하자 ‘헌법 개정, 재군비’를 주장하는 보수파와 ‘헌법 고수, 미일안보조약 반대’를 주장하는 혁신세력의 반발이 있었다.

1960년대 이후 경제중심주의로의 정책 전환 및 고도성장과 신 중간대중의 등장이 평화헌법을 지속시켰다. 진 위원은 걸프전 이후 평화헌법의 개정 요구가 다시 제기되고 현 아베정부는 헌법 개정 논의를 방침으로 삼았으나, 헌법 개정을 실현하기에는 제약이 크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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