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사)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호인 3.1운동의 발상지 봉황각(鳳凰閣)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선생의 묘를 비롯한 순국선열묘역이 있는 북한산 둘레길에 다녀왔다.

▲ 삼각산 앞에 터를 잡은 봉황각. 이곳이 1919년 3.1운동의 발상지이다.

봉황각은 1919년 3.1독립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주도적 역할을 하신 의암(義庵) 손병희 선생이 서울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2만7,900평의 터를 잡고 역사 의식을 심어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12년 세운 건물이다.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한다.

1914년 4월까지 총 483명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들은 후에 3.1운동을 이끈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민족 대표 33인 중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된 것만 보아도 봉황각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 봉황각에서는 매년 3월 1일 3.1절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다. 

봉황각 주위에 12동을 더 지어 총 13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3.1운동 후 일제가 12동을 철거하여 현재는 봉황각과 살림채만이 남아 있다. 봉황각이 존재하니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후손들이 이를 보고 3.1독립만세운동을 가슴 깊이 한 번 더 느끼 것이니.

봉황각은 ‘弓乙(궁을)’자형으로 평면이 구성된 언뜻 보기엔 민가풍으로 보이나 궁

▲ 천심(天心)의 심(心)을 표현한 궁을기.
궐의 부속건물 양식이 더해진 총 7칸의 한식 목조건물이다. 궁을은 동학 제 1대 교조인 수운(水雲) 최제우 선생이 영부(靈符: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 마음)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동학의 본질인 천심(天心)의 ‘心’자를 표현했는데 그 모양이 활 궁(弓)자를 나란히 해 놓은 것과 닮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동학의 상징이기도 하다. 봉황각 인근 천도교종학대학원(天道敎宗學大學院) 건물에서도 이를 볼 수 있었다.

봉황각에서 조금 내려오면 손병희 선생의 묘가 나온다.  아쉽게도 외부인 출입을 막아 먼발치에서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매년 3월 1일 ‘봉황각 3.1운동 재현행사’ 때 공개한다고 한다.  평상시에도 유치원생부터 모두가 독립투사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한다는 한 주민의 말이 크게 들린다. 이 말을 들으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애국의 마음이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손병희 선생 묘는 매년 삼일절에만 일반에 공개된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손병희 선생의 삶은 어떠했을까?

의암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에서 아버지 손두흥(孫斗興)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선생은 약하고 힘든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유난히 컸다.  열두 살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러 가다가 눈길 위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구휼비로 내어 준 일화는 선생의 심성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손병희 선생 초상화.

22세 때 큰조카 천민(天民)의 노력으로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한 후 2대 교조 최시형과의 인연으로 종교적 수양을 쌓게 된다. 1894년 광제창생, 보국안민의 가치를 내걸고 동학운동이 활성화되자 호서지방 중심 북접의 통령에 임명되어 남접군을 이끄는 전봉준과 함께 남북접연합군을 형성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일본군의 불법적인 개입으로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후 선생은 애국계몽운동으로 새로이 구국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 독립선언서를 읽는 손병희를 포함한 민족대표 33인을 그린 조선독립숙의도.

보성학교(현 고려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를 비롯한 문창, 보창, 명신, 양영 등 수십 개의 학교를 인수하고 신설 운영하는 등 교육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1919년 민족종교의 대표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기독교와 불교 유교계 등 각계 인사들과 3.1 독립운동의 근간인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에 합의하고 마침내 3월 1일 선생을 필두로 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국내외 8개의 임시정부가 생기고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는 결실을 얻게 된다. 그 중심에 선생이 있음을 두 곳의 임시정부에서 손병희 선생을 대통령에 선임한 것만 보더라고 알 수 있다.

독립선언서 낭독 후 스스로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그 여독으로 1922년 5월 19일 생을 마감하셨다.

▲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회원들이 북한산 순례길을 걷는 시민들에게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들' 책자를 나눠주었다.

손병희 선생은 그렇게 순국하셨으나 조국을 향한 그의 마음은 민족 독립운동의 횃불이 되어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강북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제작 '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들' 책자 배포

이번 답사는 한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을 맞아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삶과 목숨까지도 대한 독립에 바친 독립투사들의 묘역을 순례하며 감사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더욱 의미 있고 뜻 깊었다. 또한 순례길을 방문한 등산객들에게 강북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에서 제작한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들’ 책자를 나눠주며 앞으로 이런 활동의 필요성을 더욱 더 절감할 수 있었다.

▲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회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북한산 순례길 시민들에게 '순례길 의 독립운동가들' 책자를 나눠주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애국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목숨 바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봉황각과 손병희선생 그리고 강북구 애국지사 순례길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보고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스스로 나라사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