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답사는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과 유림계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심산 김창숙 기념관'을 다녀왔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

'심산 김창숙 기념관'은 2011년 서울 서초구 반포근린공원 내에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평생을 바친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의 애국애족정신과 계몽사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단재 신채호,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삼절(三節)로 평가받는 조국의 통일, 반독재투쟁, 민족사학 육성  등에 앞장선 유림출신의 민족운동가이다.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분으로도 유명하다.

     
 
▲ 일제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된 심산 김창숙 선생.

김창숙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국채보상운동, 대한협회 등의 구국활동을 하며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은 자 또한 역적이다"라며 매국노 규탄 성토문을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을 목격한 선생은 민족대표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이후 유림대표 137인이 한국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사건, 즉 파리장서 사건이다. 그해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중국지도자 손문 등과 회합하며 한중 협력과 공동투쟁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 3.1운동대표에 유림이 포함되지 않음에 한탄하며 파리장서 사건을 일으키다.

1925년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기지 건설 자금을 모금하였다. 독립운동의 침체기가 오자 식민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투척을 하고 자결, 산화한 나석주 의거를 주도하여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일깨웠다. 제2차 유림단 사건이 일어나고 1927년 상해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재판장이 본적이 어디냐고 묻자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있냐?"고 되묻는 등 재판 자체를 거부하였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라며 변호사의 변론을 거부했다. 7년 3개월 동안 옥중투쟁을 벌이다가 일제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고 병이 위중하여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선비정신을 고수하며 외로이 떠나가신 김창숙 선생.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 반대투쟁과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주도하였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유림계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자 노력하였다. 1946년 전국 유림을 결속시키고 유림의 지원을 토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아 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권위주의를 끊임없이 비판, 견제하였고 정부의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다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결국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쓸쓸히 마감하게 되었다.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을 고수한 진보적 유학자요 민족주의자인 김창숙 선생! 그의 삶을 통해 배움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세상을 구하는 데 사용하고자 했던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높은 지위와 명예를 빼앗길지라도 자신의 신념과 선비의 지조를 지켰던 그의 모습에서 눈앞의 이익에 쉽게 흔들리는 우리를 반성하게 된다.


지조를 굽히지 않는 살신성인, 윤봉길 의사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에 있는 윤봉길의사 기념관은 큰 외관과는 달리 1988년에 개관하여 시설이 오래되었고 유물보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예전에는 2층에 독립운동 사진전시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2층 전시실은 개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윤봉길의사의 기념관 시설이 이 정도라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매헌기념관.

윤의사는 19세이던 1926년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문맹퇴치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다양한 형태의 농촌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특히 야학 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농민독본」3권을 편저하였다. 1929년에는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혁의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구체적 행동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 민족의 영웅 매헌 윤봉길 의사.

1930년 '장부출가 생불환(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윤 의사는 김구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무공작대인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1932년 윤 의사는 김구와 4월 29일 거행될 일제의 천장절기념식에서의 의거 즉, 홍커우공원 의거를 준비하였다. 기념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어깨에 멘 물통형 폭탄을 일제의 주요 인사들이 서 있던 단상으로 던졌다. 기념식에 참석한 일본 군부와 정계 주요 인사 7명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잔혹한 식민통치로 한국인을 지배하고, 만주를 침략하고 상하이사변을 도발하여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쾌거였다.

▲ 김구선생과 의거를 준비한 윤봉길의사의 마지막 모습

일제는 윤 의사의 의탄으로 사망한 총사령관 시라카와의 혼을 달래기 위하여 처형장소과 시간까지도 시라카와의 근무지와 사망시간에 의도적으로 맞춘 잔학함을 보였다. 일제는 일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야쿠자식 잔인한 보복행위를 감행한 것이다. 의사의 시신은 공동묘지관리소로 가는 길 한복판에 봉분임을 알지 못하게 평장으로 이장하여 흔적조차 없이 뭇사람의 발길에 짓밟히게 하는 악랄함을 보였다.

▲ 윤봉길의사가 홍구공원의거에 사용한 도시락폭탄 모형.

윤봉길 의사가 결행한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는 국내뿐 아니라 중국 등 여러 나라에 보도되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변화로 한중연합전선 결성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게 되었다.

▲ 윤봉길동상 앞에서 살신성인정신을 다짐한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자신도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비타협, 불복종 투쟁으로 독립운동을 해나간 심산 김창숙 선생. 강보에 싸인 두 아들에게 아비 없음을 슬퍼말고 조선을 위한 투사가 되라고 말하며 25세의 짧은 삶을 살신성인 독립운동에 바친 윤봉길의사. 그 분들의 희생으로 편안히 살고 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그 뜻을 이어받아 나 혼자만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하는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