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독립운동기념관의 주목할 만한 자료로 ‘배달족강역형세도’와 ‘채색강역형세도’가 있다. 독립운동가 이원태(李源台, 1899-1964)의 저술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재로 사용됐다고 한다.신흥무관학교는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 지역에 설립한 독립군 양성학교로 유명하다. 1910년 12월 이회영, 이시영 등 6형제를 시작으로 이듬해 2월 이상룡, 김동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도무지 역사관념이 없어 단기삼국(檀箕三國)이 어떤 역사인지 알지 못하고 조국정신이 나날이 없어지니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단군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역사를 《대동사(大東史)》로 펴낸 독립운동가 류인식(1865~1928)의 말이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2년 저술에 착수해 1917년 초고를 완성했다. 이후 1920년까지 수
지난달 25일 경북 안동을 찾았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다. 이곳에 2007년에 개원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2014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승격됐다. 올해는 2017년 재개관을 목표로 대대적 증축에 나서고 있다. 3월 공사에 앞서 최순남 안동국학원장과 현장을 찾은 것은 이곳에 를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해마다 10월이면 오색찬란한 ‘유등’이 진주의 남강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보다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2010년과 2011년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된 ‘진주남강유등축제’가 그것이다. 진주시는 축제의 기원을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3,800여 명의 군관민으로 왜군 2만 대군을 물리친 진주대첩에서 찾는다고 밝혔다. 당시
최현배(1894-1970)의 호는 외솔이고 경남 울산출신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한성고등학교와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였고 연희전문교수, 교육부 편수국장을 역임하였다. 최현배는 주시경의 한글강습원에서 한글을 익혔고 나철을 따라 대종교의 행사에 참여하였으며 대종교 경전을 읽었다.“이 때(경성고보 2학년 때인 1911년) 선생님은 학교에 열심히 다니시는 외에 다른
진주는 충절의 땅이다.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시민 장군은 3,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왜군 2만 명을 물리쳤다. 그 유명한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이듬해 2차 전투에서는 7만 민관군이 10만 왜군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다. 승전을 자축하던 왜군의 자리에서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이가 있었다. 조선의 관기 논개다. 이러한 역사는 교과
장소가 중요하다. 일제의 눈을 피해서 독립운동을 하려면 비밀리에 모일 수 있어야 한다. 1913년 달성친목회원으로 평소 국권 회복에 대한 뜻을 가지고 있던 서상일(徐相日), 이시영(李始榮), 박영모(朴永模) 등은 윤창기(尹昌基)가 안일사(安逸寺)에서 약을 먹기 위해 체재 중인 점을 빌미로 모임을 가진다. 이들은 이곳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고 임시정부에
김두봉(1898-1961?)은 경상남도 기장 출신으로, 한글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주시경의 제자로, 조선어학원에서 한글을 배웠고 주시경을 이어서 한글문법과 사전에 천착하여 , 을 펴냈다. 그러면서 그는 나철의 제자이기도 했다. 나철이 1916년 구월산에서 폐관(자결)할 때, 그를 모시던 6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두봉은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의 지하 전시관을 보고나서 1층 생가로 이동했다. 생가 앞에는 한글과 새를 융합한 작품이 눈에 띈다. 최정유 작가가 만든 '최현배-한글 날아오르다' 작품이다.김성회 문화관광해설사는 “한글이 세계로 비상하는 모습”이라며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이 수출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문자가 없는 외국 민족에게 한글표기법을
울산은 옛 신라의 땅이다. 당시 신라인들은 고조선에서 왔다. 김부식은 신라본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았다고 밝혔다. 이승휴 또한 에서 신라는 단군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특히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이름부터가 남다르다. 성씨인 박(朴)은 밝, 밝음의 한자식 표기이다. 이름인 혁거세(赫居世)는 우리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