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사진 이우석 수기 표지 일부.
신흥무관학교. 사진 이우석 수기 표지 일부.

“북간도 독립군이 자유시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북로군정서도 들어오는 줄 알고 자유시로 가려 길을 떠났다. (중략) 연해주에 모인 독립군은 3천여 명이었는데 2천여 명은 헤어지고, 이곳에 온 군인은 1천여 명 가량인데 홍범도와 이청천(=지청천)이 따라왔다고 한다.

애초에 약속은 무기를 해제하고 자유시에 가서 도로 내준다고 해서 무기를 벗어주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이 핑계 저 핑계 하고 주지 않는다는 것이 큰 불평의 하나이고, 또는 농가로 다니며 걸식하는 것이다.”

청산리전투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고故 이우석 선생의 수기 중 일부이다. 23살에 독립군에 자원하여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던 그는 1921년 자유시참변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청산리전투 참가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우석 선생의 수기 완역. 이우석 선생은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격상되었다. 사진 독립기념관.
청산리전투 참가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우석 선생의 수기 완역. 이우석 선생은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격상되었다. 사진 독립기념관.

최근 육군사관학교 교정 내 독립운동가 5인 흉상 중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뜨겁다. 육사의 정체성을 신흥무관학교로 정의하는 상징물이기에 여파가 더욱 크다.

지난 8월 29일 국방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국방부 입장문을 통해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는 내용을 배포해 진보와 보수 양 진영에서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1950년 전후 냉전의 논리로 1920년대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에 대한 모순이라는 지적, 일제의 식민지배를 조선 근대화로 인식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발현이 아니냐는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

이로인해 그 어느 때보다 ‘만주벌 호랑이’라 불리던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와 2020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그리고 1921년 러시아 자유시에서 일어났던 자유시 참변이 조명받고 있다.

자유시 참변은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이 자작극 훈춘사건을 일으켜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2만여 병력을 투입해 독립군 색출과 동시에 경신참변 등 한인 민간인 학살 을 저질러 독립군이 밀산에 집결했다가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해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자유시로 들어갔던 독립군 중 고려혁명군(이루쿠츠크파) 일부가 러시아 공산당 붉은 군대에 협조해 무장해제를 거부한 상해파(대한의용군) 부대들에 발포해 사살했다.

과연 자유시참변 현장에서는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고, 홍범도 장군은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 현장의 증인 이우석 선생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살펴보자.

수기 중 이우석 선생은 참변의 원인에 대해 당시 겪은 상황과 견해를 밝힌 부분이 있다. “동영현에 집결한 독립군을 총합하여 독립군 총사령부를 설정하고 홍범도 씨를 총사령관으로, 이청천(=지청천) 씨를 부사령관으로 선출하여 독립군을 통솔했다”며 이를 중심으로 각 독립군 단체들이 러시아에서 “우리 독립군 활동에 협력을 받을 희망을 가지고” 자유시로 간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당시 연해주에는 러시아 혁명군과 같이 (협력해) 전쟁을 치른 한인 군대 박일리야부대와 러시아에서 자라난 교포 2세 청년, 독립단 군인으로 구성된 박그레고리 부대가 있었다. 수기에는 홍범도, 이청천(지청천) 중심의 독립군 총사령부는 박그레고리를 통하지 않으며 교섭을 할 수 없어 그를 통해 교섭하며 일본에 대한 철병 문제로 독립군을 자유시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우석 선생의 수기 53페이지. 사진 독립기념관 완역본 갈무리.
이우석 선생의 수기 53페이지. 사진 독립기념관 완역본 갈무리.

그런데 수기에 “각 단체의 수령들은 배척을 당하고 군인들은 자유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박일리야는 홍범도, 이청천(지청천)도 배제하려고 한다. 홍범도 씨와 이청천 씨는 책임상 자유시까지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감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라는 기술이 나온다.

부하들을 이끌고 온 독립군 지도부가 해당 지역에서 기존에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군 세력에 견재당하며 난관에 처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자유시(흑하지방)에는 독립운동가 오하묵이 이끄는 자유대라는 군대가 있어 해당지역에서 “주인격이었다”고 수기는 말한다. 오하묵은 자유시에 도착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의 통합을 추진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부대가 있었다.

수기에는  “박일리야는 합하는 날이 되면 온 세력을 넘겨주게 된다. 그럼으로 합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으나 1천여 명 군대에 군수물자를 보급받지 못하니 농촌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농민(러시아)의 원성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농촌도 양식이 다 떨어진 형편”이라고 기술했다.

무장해제에 불응하던 상해파가 러시아 농민들과 마찰을 빚고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러시아 극동정부 군대에 의해 강제 무장해제 당하며 사건이 발발했고 이 과정에 이루쿠츠크파 일부가 참여했다는 것이다.

결국,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대한의용군의 군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이 희생당한 것이다. 황민호‧홍선표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에 기록된 바를 보면, “추후 독립군은 이 참변에서 사망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1명, 포로 917명 등의 한국독립군 희생이 있었다고 성토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나라를 잃고 전장에서 생사를 걸고 독립운동을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군권, 즉 권력을 가지려는 충돌이 빚은 비극이다. 이 사태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참변 당시 홍범도, 지청천, 안무 등 지도부는 현장에서 떨어진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지도부는 어느 편을 고집하기보다 독립군 부대들의 신속한 통합을 원했지만, 참변은 일어났고 이에 통분을 참지 못했다.

윤상원 저서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2017)’에는 “(자유시참변 소식을 들은) 홍범도는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라 기록되었다.

이우석 선생은 자신의 독립운동행적을 1980년~1982년 박영석 교수와 인터뷰에서 밝혔고, 『한 獨立軍兵士의 抗日戰鬪 - 北路軍政署兵士 李雨錫의 事例』라는 제목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선생은 인터뷰 과정에서 자신의 행적을 정확히 남길 필요를 느끼고 꼼꼼하게 수기를 쓴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자신이 사용하던 근대식 한글 어투에 한자를 섞어 수기를 작성했는데 자신의 치부라 여길만한 부분까지 숨김없이 세세하게 기록했다.

수기는 이우석 선생 사후에 유족에 의해 2010년 K스피릿에 전달되어 일부 연재하였고, 이후 유족은 수기 원본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완역하여 양장본으로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