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도로 가다

이시영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 입각차 가는 길이고 이장령 선생은 봉천까지 전송차 온 터라 다시 서간도로 돌아갈 참이었다. 그런데 북간도에서 왔다는 청년 두 사람이 편지를 전했다. 그 편지는 이장령 선생이 북로군정서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며 두 청년은 이장령 선생을 모시러 왔다고 했다.

이장령 선생은 먼저 서간도에 가야했고 나도 신흥학교에 들어가려고 같이 길을 떠났다.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하니 그곳이 우리의 서울인 것 같았다. 서로군정서 독판부가 있고 헌병대가 있고 신문사가 있었다. 나는 헌병대에서 숙식했다. 십여 일을 머무는 동안 이장령 선생은 나를 데리고 독판부에 가서 독판 이상룡 선생과 부독판 려준 선생에게 인사를 시켜주셨다.

그리고 나에 대해 의논을 하신 모양이다. 당시 신흥학교의 불상사(윤치국 치사사건)로 인하여 이청천 선생이 학생들을 데리고 백두산으로 들어가 백산농장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형편인지라 입학이 불가능했기에 나는 이장령 선생 일행과 다시 북간도로 가게 되었다.

1920년 4월 <북간도로 가다>

  신흥학교 졸업생 중 백종열, 강화린 두 청년은 서로군정서 사관연성소 무관으로서 같이 가게 되었다. 나는 같이 가는 길에 군사학 책자 30여 권을 짊어지고 갔다. 일행 6명은 탄순로를 거쳐 안도현 지역에 들어섰다. 송화강을 따라 산으로 산으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신비의 백두산을 올랐다. 험한 길에 지친 다리는 무겁기만 했다. 해는 저무는데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무인지경이다. 마침 대전민박옥이 보였다. 청년 3, 4명이 나타나 우리의 행색을 보고 반가이 맞아준다. 알고 보니 광복단 본부라고 한다. 하룻밤을 잘 잤다.

그 이튿날 주인들은 하루 쉬다 가라고 한다. 피곤한 차라 마지못하였지만 실은 기쁘다. 송화강에서 천렵하러 강가로 십여 명이 백사장에 가마를 걸고 낚시로 은어를 낚아 잠깐 한가마 끓였다. 강안 절벽에는 진달래가 피었는데 강기슭에는 아직도 녹다 남은 얼음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쳐다보니 모든 피로가 풀렸다.

안도현 지계를 넘어서니 먼 북간도인 연길 현이었다. 토문자 부락은 북로군정서에 속한 지방이었다. 같이 왔던 청년 두 명은 자기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고 이장령 선생과 백종열, 강화린 두 청년은 너무도 피곤하여 며칠 동안 휴양하기로 했다. 나는 군책 삼십 권을 짊어지고 왕청현 서대파구에 있는 북로군정서 본령으로 가기로 하고 이튿날 길을 떠났다. 안내원을 따라 이 동네로 저 동네로 따라갔다. 하루 길을 걷고 이튿날 정오쯤 되었다. 포성이 은은히 들렸고 갈수록 가깝게 들렸다. 동민들의 말을 들으니 봉오동에 왜병이 들어와서 의군부독립군과 싸우는 포성이라고 했다. 더 전진할 길이 없었다.

안내원도 없고 동민들도 피신하느라고 분주했다. 부득이 사정하여 토문자 부락으로 도로 왔다. 그 후 본령에서 우리를 데리러 와서 왕청현 서대파구를 들어가니 산중에 세 가구가 사는 곳이다. 김좌진 선생이 거하는 좁은 방에 들어가니 반가이 맞아준다. 사관연성소는 5리쯤 들어가서 산중에 있는데 연성소 생도는 2백 명 정도라고 한다.

1920년 6월 <무기운반을 하러 가다>

연성소의 입학시기가 한 달 더 있어서야 제2기생을 모집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무기를 운반하러 러시아의 노령에 갔다 오라고 한다.

그래서 경비대에 편성되어 분대장이 되었다. 경비대는 무기 운반하는 2백여 명을 호위하여 같이 갔다 오는 것이다. 지방에서 뽑아 온 농민 이백여 명과 경비대원 30여 명이 길을 떠났다. 산길로 산봉우리를 타고 훈춘지방에 가서 민가에서 자고 국경을 넘어서 노령으로 갔다. 삼십여 호 되는 동포에게 부탁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칠십여 리쯤 가 먼 해삼위항 남쪽 내해안이었다. 배편으로 이곳까지 가져오면 받아가지고 온다 했다. 2~3일 내로 갈 줄 알았더니 의외로 “무기매수에 실패했다.”는 통지가 왔다. 실패 원인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화폐개혁이 되어 가져간 돈이 못 쓰게 된 까닭이다.

그런 즉 그 당시 형편은 돈도 어렵고 동원된 운반대를 돌려보냈다가 다시 동원하기도 어렵다. 기다리자니 2백여 명의 식량문제도 문제이고 잠깐 운반하러 온 농민들은 농사도 가사도 낭패 지경이고 그 보다 더 큰일은 군정서의 위신과 민심의 실망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무기는 가지고 가야만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