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 본영을 옮기다-이영移營> 1920년 7월

사관연성소 제2기생을 모집하면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나에게는 또 실망이다. 학교는 백두산으로 옮겨 간다고 한다. 무기를 운반해오면 곧 떠나기로 고대하던 터라 그 이튿날 새로 군대편성을 했다. 무기 운반 갔던 대원도 1백여 명이 입대를 지망하였고 경비대도 보병대로 개편하여 4개 중대와 1개 대대가 되었다.

대대장 김규식 제1중대장 홍충희, 제2중대장 강화린, 제3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가 각각 임명되었다. 사관연성소생은 학도단이라 별칭하고 단장에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전군 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행군명령으로 행선지는 백두산이라 했다. 우리 독립군은 독립전쟁을 하러 가는 듯 의기충천하였다. 지나가는 곳 마다 주민들의 환호성이다. 기관요원과 지방 인사들을 합하면 1천 여 명이나 된다. 그러고 이삿짐을 운반하는 우차(牛車)가 백여 대가 되었다. 그러니 행렬이 십여 리나 줄을 이었다.

이러한 대행군(大行軍)은 하루에 고작 이십 리 혹 삼십 리씩 밖에 못 갔다. 왜냐하면 주민들이 입군하겠다고 소를 잡고 대접을 하는데 거절할 수 없어서였다. 우리가 화룡현 청산리에 오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청산리는 백두산 동쪽 기슭이다.

청산리 백운평 부락에 음력 9월 4일 경 도착하였다. 산촌에 가을은 만연하기만 했다. 겨울 옷 생각이 간절하다. 겨울옷은 각 지방에서 분담했기 때문에 먼저 온 곳도 있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 많았다. 그러므로 오는 대로 한가지 씩 나눠 입었다. 내게는 솜바지 하나 차례가 왔다. 그 때의 곤란한 형편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때를 이용하여 왜적은 독립군을 격파할 계략을 세웠던 것 같다. 우리는 설마 중국 영토 내에는 왜놈이 침범 못하려니 안심한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북간도 일대가 떠들썩하게 행군을 1개월여 나 한 것이 잘못이 아닌 가 생각해 보았다.

이영지(移營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양론이 있었다고 했다. 서일 총재는 후방인 중소국경(中蘇國境)지대인 노령접경지역으로 옮기자고 한데 반하여 현천묵 총재는 백두산으로 가자는 것이다. 후방으로 가면 인적 물적 자원을 모으는데 곤란하고 전방으로 가면 인적 물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 총재의 의견을 따라 청산리로 온 것인데 오랜 행군으로 인하여 주민들의 환심을 얻기도 했지만 단체 시기심도 샀다. 도중 불상사로 북간도국민회와 충돌하여 대대장 김규식씨가 총상을 당하여 군대통솔에 지장을 초래하였고 왜적이 국경을 넘을 구실을 준 줄로 안다.


-이우석은 일개 분대장에 불과한 병사로서 전투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사령부의 전략이나 작전 같은 것을 상세하게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실제 최전선의 전투원으로서 참가하여 얻은 체험적 증언이 이 전쟁의 상황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도록 했다.-

청산리 백운평에 도착한 것은 음력 9월 4일이다. 초병이 무산에서 간도로 들어온다는 첩보가 있어 전방 입구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전투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왜적부대가 후방으로 연막작전을 하는 것 같다는 정보가 있으므로 포위하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후진하여 산중으로 들어갔다. 9월 7일 우리 군대는 안도현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식량을 구하려고 밤중에 감자를 운반하기로 하고 결사대 육십여 명을 뽑아 감자 구덩이를 찾아 밭으로 갔다. 밤새도록 가져온 감자는 한 사람에게 20개씩 돌아간다. 하루 한 끼 3개 이상 못 먹는다고 명령을 내렸다.

삼일간은 무인지경으로 가야 안도현 방면으로 갈 수 있는 까닭이다. 군인 외에 피신 온 인사가 많았다. 음력 9월 8일 협소한 산속 행군이라 새벽에 떠났으나 십리 가량 와서 해가 떴다. 감자를 구워 먹었는데 빨리 굽기도 어려웠다. 덜 익은 감자를 먹으면서 행진했다. 나는 제4중대 3소대 제3분대이다. 우리 중대는 전 군이 다 떠난 뒤 후방을 지키다가 떠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상세 중대장은 출발당시 나에게 상등병 2명을 대동하고 후방에 적정(敵情)을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 명령을 받고 후방전면으로 내려 달렸다. 산모퉁이를 지나면 전망이 좋을 듯싶어 산모퉁이를 돌아내려 달렸다. 한 5~60보 거리에 적의 척후병이 나타났다. 적병은 겁을 잔뜩 먹고 좌우편만 두리번거렸다. 내가 급정지하여 사격자세를 취하는 사이에 가랑잎 소리에 놀란 적은 신호총을 쏘면서 달아났다. 좌우가 절벽인 만치 그야말로 한 사람이 만 명을 대적할 요지였다.

우리 중대는 3시간 이상 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산비탈에 매복하였으나 적이 나타나지 않아 본대의 행방을 찾아 산봉우리를 넘어섰다. 안도현 방향으로 가려던 것을 왕청현 방면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식량문제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적군은 우리를 포위하기 위하여 백운평 뒷산에 미리 올라갔다. 전면으로 적이 들어오는 위세를 부리면 반드시 저희를 막으러 올 것으로 생각하고 후방에서 우리를 공격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대는 포위망을 벗어나서 천수평 쪽으로 빠져나갔다. 우리 중대는 9월 9일 천수평에 도착해 적군과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