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명재상으로 오성으로 많이 알려진 백사 이항복이 친필로 쓴 '이항복 해서 천자문'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예고 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조선의 명재상으로 오성으로 많이 알려진 백사 이항복이 친필로 쓴 '이항복 해서 천자문'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예고 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정미년(1607년) 이른 여름(음력 4월) 손자 이시중에게 써 준다. 오십 노인이 땀을 뿌리고 고생을 참으며 썼으니, 골짜기에 던져서 이 뜻을 저버리지 마라.”

조선의 명재상으로 오성으로 잘 알려진 이항복이 52세가 된 정미년 여름에 여섯 살 어린 손자의 교육을 위해 손수 또박또박 적어 천자문을 만들고, 진심을 적어 당부한 말이다. 이 내용이 천자문 끝장인 126면에 행초서로 쓴 발문으로 적혀있다.

천자문 끝에 행초서로 백사 이항복이 쓴 발문. 어린 손자 교육을 위한 자상한 할아버지의 면모가 드러난다. 사진 문화재청.
천자문 끝에 행초서로 백사 이항복이 쓴 발문. 어린 손자 교육을 위한 자상한 할아버지의 면모가 드러난다. 사진 문화재청.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은거할 때 쓴 것으로, 관료 생활과 임진왜란으로 인해 두 아들의 교육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이항복이 맏아들의 장자인 시중의 교육을 위해 친필로 쓴 자상한 할아버지의 면모가 드러난다.

문화재청은 2018년 이항복 종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17점 중의 하나인 ‘이항복 해서 천자문’ 친필본을 지난 13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예고 했다.

총 125면인 천자문은 한 면마다 8자씩 굵고 단정한 해서체로 쓰여있으며, 당대 서예에 명성이 있던 그의 노년 원숙한 필법을 보여줌과 동시에 부드럽고 단아함이 느껴진다. 글자 아래 한글로 음과 뜻을 적었다.

해당 천자문은 종가에서 400년 넘게 소장해오던 것으로, 합지로 만든 표지는 밀랍이 흑갈색으로 변하고 겉층이 긁히고 떨어졌으며, 내지는 너덜거렸으나 글씨가 분명하여 가독성의 문제가 전혀 없다.

특히, 표지 다음 내지의 오른쪽 아래 백문방인(찍었을 때 흰 글씨가 나오는 네모난 모양의 인장)으로 ‘청헌聽軒‧월성세가月城世家’라는 인영이 찍혀 있다. 청헌은 이항복의 6대손 이경일(1734~1820)의 호로, 해당 천자문을 집안 대대로 간직했음을 알 수 있다.

'이항복 해서 천자문' 표지. 사진 문화재청.
'이항복 해서 천자문' 표지. 사진 문화재청.

‘이항복 해서 천자문’의 문화재 가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전하는 《천자문》 중 가장 크게 쓴 육필이고,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란 점이다. 순조 때 문신 신위가 쓴 ‘신위 해서 천자문’보다 200년 앞선 작품이다.

육필이 아닌 인쇄본으로는 하버드-옌칭 도서관에 소장된 순창 무량사본 ‘신간천자주석(1566)’,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1575년(선조8) 전라도 광주에서 간행된 ‘천자문’, 1583년(선조16) 석봉 한호의 필체로 간행한 목판본 ‘석봉천자문’ 등이 전한다.

둘째, 제작 연대와 작가가 분명하고, 이항복이 후손 교육에 쏟은 관심과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가치가 있다.

셋째, 한글로 음音과 훈訓을 더해 17세기 초‧중기 한글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등에서 문화재 가치가 높다고 평했다.

이항복, 백사선생 수서제병진척첩(36 X 20.7cm, 82 부분). 사진 문화재청.
이항복, 백사선생 수서제병진척첩(36 X 20.7cm, 82 부분). 사진 문화재청.

또한, 이항복은 당대 뛰어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으나 전하는 작품이 많지 않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백사문충공진적첩白沙文忠公眞蹟帖’에서 굳세고 질박한 서풍이 드러난다.

한편, ‘천자문’은 한자 입문서로, 6세기 초 중국 남조 양梁 무제의 명을 받아 주홍사가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5세기 초반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도 있어, 만들어진 시기, 전래된 사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