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 진사라는 사람인데, 본디 그대 부친과 친교가 두터운 사람이라 특별히 찾아온 것일세.”

그가 안중근을 찾아온 데에 뜻이 있었다. 
 
“선생께서 멀리서부터 찾아오셨으니 무슨 좋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대는 기개를 가지고 있는 지사로서 지금 이같이 나라정세가 위태롭게 된 때에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가?”
“무슨 계책이 있습니까?”
“지금 백두산 뒤에 있는 서북간도와 러시아 영토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등지에 한국인 백여만 명이 살고 있는데, 물산이 풍부하여 한번 활동할만한 곳이 될 수 있네. 그러니 그대 재주로 그곳에 가면 뒷날 반드시 큰 사업을 이룰 것일세.”
 
▲ (왼쪽) 안창호, (오른쪽) 양기탁
 
안중근이 듣고 보니, 눈이 번쩍 뜨이는 충고였다. 자기가 산동과 상해를 헤메고 다닌 것도 그렇게 하자는 데에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꼭 가르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김 진사는 말을 마치고 돌아갔다. 안중근은 국채보상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인 순사 1명이 안중근을 조사차 찾아왔다. 
 
“회원은 얼마이며 재정은 얼마나 거두어졌는가?”
 
일본인 순사가 따져 물었다.
 
“회원은 2천만 명이요, 재정은 1천3백만 원을 거둔 후에 보상하려 한다.”
 
일본인 순사는 화를 네며 욕설을 퍼부은 후에,
 
“한국인은 하등 사람인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냉소했다.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을 것이요, 빚을 준 사람은 빚을 받는 것인데, 무슨 불미한 일이 있어서 그같이 질투하고 욕질을 하는 것인가?”
 
안중근은 지지 않고 맞섰다.
 
“건방진 놈! 조선 놈 주제에! 제국 순사에게 대어들어?”
 
일본인 순사는 안중근의 뺨을 후려쳤다. 안중근은 이를 악물었다. 그자로부터 2격이 날아왔다. 그러더니 연이어 발길질이 날아왔다. 함께 있던 한국인들은 일본인 순사의 위세에 눌려 눈치만 볼 뿐이었다.
 
“이 같이 까닭 없이 욕을 본다면 대한 2천만 민족이 장차 큰 압제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어찌 나라의 수치를 달게 받을 수 있을 것이냐.”
“안중근도 일본인 순사를 향하여 달려들어 같이 치기를 무수히 하였다. 일본인 순사는 열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뜯어 말리었다. 
“저런 자를 두들겨 팬들 속이 시원하겠는가?”
 
안중근은 탄식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해 6월에 네델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일본에게 을사조약으로 주권을 박탈당한 한국의 광희 황제는 정식으로 사절을 파견하여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3사람을 밀사로 파견했다. 
 
당시에 이용익李容翊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객에게 중상을 입고 누워 있었는데, 고종이 이용익의 친척을 한 사람 보내어 밀사를 헤이그에 보내는데 도와주라고 지시하였다. 이상설 등은 자기들이 한성을 떠날 때는 떠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떠났지만 다만 이용익의 지시를 받으라는 명령만을 받고 있었다. 고종은 이용익에게 헤이그에서 필요한 황제의 위임장과 기타 문서를 밀송했다. 밀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이용익을 찾아갔다.
 
▲ 3인의 밀사
 
이용익은 이들에게 밀사로서의 사명을 주고 헤이그로 출발시켰다. 이들은 황제의 전권위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휴대하고 있었다. 밀사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1907년 5월 20일 페테스브르그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위종의 아버지이며 러시아 공사를 지낸바 있는 이범진李範晉의 소개로 전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만나서 러시아 황제를 알현토록 주선해 달라고 했으나, 황제는커녕 외무대신조차도 만나지 못하고 그냥 헤이그로 떠나야 하였다. 이들이 러시아 황제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만국평화회의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페테스부르그를 떠나 6월 24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6월 30일부터 각국의 신문에 한국의 밀사가 도착했다는 보도가 실리기 시작하였다. 일본대표는 한국 밀사의 출현에 당황했다. 이위종은 오래 동안 러시아에서 생활하여 영, 불, 러시아어에 능통한 젊은이였다. 그는 밀사 중에서 나이가 가장 연소했지만 7월 8일 밤 각국의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창한 불어로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당한 경위와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이 소식은 통감 이토오에게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하였다. 이토오는 광희 황제를 퇴위시키고 본격적으로 한국을 이토오의 치하에 두게 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이토오는 광희 황제를 찾아갔다. 
 
“음험한 수단으로 보호권을 거부하기보다 차라리 당당하게 선전宣戰을 포고함이 접경일 것이요.”
 
그는 광희 황제를 노려보며 폭언을 퍼부었다. 이때 송병준은 이토오의 조종으로 이완용 내각의 농상공부대신으로 입각해 어전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신분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일진회의 송병준을 시켜 일진회 회원 수백 명을 동원하여 등불을 들고 궁궐을 포위하여 시위케 하고 어전회의를 열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폐하께서 스스로 일본에 건너가서 천황에게 사죄하든가 대한문에 나가서 하세가와 대장에게 사죄하십시오. 이 2가지를 못 하신다면 일본에게 결연히 선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패도지一敗塗地하면 국가의 존망은 가히 추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은 누구의 신하요? 내가 경 같은 충신을 일찍이 만나지 못하여 한스럽도다.” 
 
고종은 통분하여 탄식하였다. 이토오의 등살에 광희 황제는 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7월 22일 태황제로 물러나 앉았다. 양위에 앞서서 19일에 대리조칙이 내려지자, 유생과 백성들이 대한문 앞에서 통곡하고, 전동병영典洞兵營의 시위보병侍衛步兵의 제1연대 100명이 황제가 일본으로 행행行幸한다는 소문을 듣고 뛰어나와 종로에 있는 일경의 교번소交番所(파출소)에 발포하여 일인을 죽였다. 장안이 소란해지자, 이완용은 일진회가 지키고 있는 송병준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출동하여 시위를 곧 진압해 버렸다. 그로부터 4일 후에 이토오는 한국 내각에 정미7조약을 내놓았다. 이 조약은 한국의 사법, 행정권과 관리임용권을 일본이 뺏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조약을 자기들의 뜻대로 체결했다.
 
이토오 통감은 광희 황제가 퇴위하기 하루 전인 19일 14시에 벌써 제51연대 제3대대를 동원하여 덕수궁을 점령했고, 포병 제17연대의 1개 중대로 하여금 남산에 야포 6문을 배치토록 하였다. 그리고 친일파 대신의 집과 남대문역, 서대문역, 조선정부군 화약고에 경계병을 배치했다. 8월1일 한국군을 해산했다. 해산되는 시위 제1,2연대의 2개 대대가 궐기하여 일본군 제51연대와 접전이 벌어졌다. 8월 3일에 원주 진위대가 궐기했다. 8월 9일에 수원 진위대 강화 분견대가 궐기했다.(끝)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