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념 속에서 잊혀진 105년 전 역사적 사건
기억과 기념 속에서 잊혀진 105년 전 역사적 사건
  • 민성욱 박사
  • culture@ikoreanspirit.com
  • 승인 2015.07.27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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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칼럼 : 『국학을 통해 바라본 우리 역사』75

남산 한옥 마을,  서울을 여행하는 외국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방문하는 곳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남산 한옥 마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필자도 남산 한옥 마을 지나치면서도 별 관심을 갖지는 못하였다. 그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옥마을이 아니겠는가 하는 지레 짐작을 하면서…그렇게 지나쳤다.

▲ 민성욱 박사
그런데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그곳은 일제 식민지 통치의 거점이었다. 지금은 전통이 숨 쉬는 아름다운 한국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격세지감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한국의 집 홈페이지에서는 '한국의 집'은 내·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홍보하기 위한 문화공간으로, 전통음식, 전통공연, 전통혼례를 진행하고, 전통문화상품을 판매하고 체험하는 전통한옥이고,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자로서 사육신의 하나였던 박팽년의 사저 터이며, 해린관, 문향루, 청우정, 녹음정 등 한옥 건축물은 궁중음식문화를 보급하고 있어 궁중 문화에 적합한 아름다운 한국미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출처 : 한국의 집 홈페이지 http://www.koreahouse.or.kr]

전통의 향기가 있다는 한국의 집, 그곳이 100년 전에는 무엇이 존재했는지 기억하고 있거나 알고 있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역사적 사실 중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념하며 무엇을 기려야 될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된다. 우리의 주권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빼앗긴 10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겠다. 과거 청산 혹은 일제 잔재 청산은 어디까지 해야 되는지 또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리고 왜 해야 되는지를 역사를 통해 알려 줄 필요가 있다. 그저 역사공부를 하라고 하면 거부감만 생길 뿐이다.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인들의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들을 기리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한국인의 길을 모색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100년도 더 지난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기억을 더듬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 침략기관의 거점이 되었던 1884년 일본공사관은 현재 예장동에 있었고, 1898년 남산대신궁은 일본 신사로서 지금의 숭의학원 일대에 있었으며, 1905년 을사늑약체결과 함께 세워진 통감부는 구 안전기획부 자리이자 현 서울종합방재센터 자리에 있었다.
1906년 경성이사청은 일본 영사관으로 지금의 한국의 집 자리에 있었고, 1914년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지금의 남산골 자리에 있었으며, 1925년 일본신사인 조선신궁이 지금의 남대문과 남산식물원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1929년 이등박문을 기리는 사당인 박문사가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고, 1937년 일본의 상하이 사변 당시 일본인 결사대 동상인 육탄 삼용사 동상이 지금의 장충단 공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장충단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1895년 10월 8일 당시 끝까지 저지하다 목숨을 잃은 훈련대장 홍계훈,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고종은 장충단을 어영청 군사들이 무예훈련을 하던 남소영에 세우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당시 장충단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기리고, 일제의 침략에 분연히 저항하는 조선인들의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성지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립현충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선총독부는 장충단을 없애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안중근 의사에 의해 죽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세우고, 일제의 전쟁영웅인 육탄삼용사의 동상을 세우는 등, 장충단을 일본인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공원을 만들면서 많았던 소나무를 다 베어 버리고 벚꽃을 심어 지금의 장충단 공원에는 장충단은 사라지고 공원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 후 매년 봄 장충단공원에는 이때 심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광복 이후 박문사를 없애고 육탄삼용사의 동상도 헐어버렸지만 장충단의 복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여기서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근ㆍ현대사에서 식민통치와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오욕의 역사가 한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남산 한옥 마을이다. 즉 남산 한옥 마을 자리에는 옛 조선헌병사령부 터이자 옛 수도방위사령부 터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는 왜성대라고 불리던 통감부터와 경복궁을 허물고 조선총독부가 이전하기 전까지 일제 식민통치의 중심지였다.
일제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망을 건설했고, 그리고 명동, 을지로, 충무로 일대는 식민 상권과 식민통치기관 지역으로 정하면서 장악하였던 것이다.
일본 헌병은 1910년대 일제 무단통치하에서 일반 치안업무까지 장악한 가운데 식민지배의 물리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헌병대로 개편된 이후 헌병경찰제도 아래서 헌병사령관이 경무총감을 겸직한 가운데 조선헌병대는 무단통치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3ㆍ1 운동 진압의 주역으로 악명을 떨쳤다.
결국 지금의 남산 지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조선후기 중앙 군사조직을 살펴보자. 임진왜란 이후 중앙군사조직은 5군영 체제로 바뀐다. 여기서 5군영이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을 말한다. 여기서 지금의 남산골에 해당하는 지역에 주둔했던 남별영과 남소영은 각각 금위영과 어영청의 분영으로 수도방위의 임무를 띤 조선후기의 군사 주둔지로 각각 설치되었다가 대일항쟁기에는 조선헌병대사령부가 광복 이후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다시 주둔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도방위사령부는 1961년 재창설되어 1년 후에 지금의 남산골로 이전하였고, 1963년에 수도경비사령부로 개칭, 다시 1984년에 수도방위사령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1991년 지금의 남태령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 남산골에 있었다. 1998년 지금의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옛 도성민들의 휴식 터였던 이곳을 다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 남산골에서 기념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이 그것인데, 이것은 서울정도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캡슐에 담아 400년 후인 서울 1000년 후손에게 문화유산으로 전하고자 조성한 것이다. 매설은 1994년에 했고, 개봉은 2394년에 할 것이다. 캡슐은 보신각종을 본뜬 모양이다.

 400년 후인 24세기에 사는 후손들은 21세기를 사는 현재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캡슐 속에 든 현 시대를 대표하는 문물들을 보면서 조상들의 빛나는 얼과 정취를 느낄 수 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우리는 역사를 살펴보면서 역사의 한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넘나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산이라는 역사 공간에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념하며, 또 무엇을 기려야 될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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