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발해는 지금의 발해가 아니었다1
고대의 발해는 지금의 발해가 아니었다1
  • 민성욱 박사
  • culture@ikoreanspirit.com
  • 승인 2015.04.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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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칼럼ㅡ『국학을 통해 바라본 우리 역사』69

몇 해 전에 모 학술회의 장소에서 받았던 질문이다. "발해의 원래 국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의 의도는 발해라는 국호는 중국 사대주의 사관의 발로이며, 원래 국호는 대진국(大震國)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발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그런가에 대해서는 따져 보아야 될 것이다. 우리의 논리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 민성욱 박사

우선 당나라 시대 역사서인『신당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당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이라고 하였다. (중간생략) 예종 선천(先天) 때에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 도독’에 책봉하자 이때부터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런가 하면『삼국사』와 『신라고기』에서는 처음부터 국호가 발해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통전』의 내용을 토대로 선천 연간에 말갈이라는 이름을 비로소 버리고 발해라고 하였다. 여기서 선천은 당나라 예종 때의  세 번째 연호로 712년8월~713년11월의 1년여 간 사용되었다.

『환단고기』중『태백일사』「대진국본기」에서는 대중상은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했고, 대조영은 국호를 다시 위대한 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대진(大震)이라고 바꾸었으며,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중국은 처음에는 말갈의 나라로 폄하했고, 712년에 발해군왕으로 불렀으며, 762년에 비로소 발해국왕으로 불렀다. 이렇게 중국이 어떻게 불렀느냐와 관계없이 당나라 예종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는 시기가 712년이고 그 이후 어느 시점에서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 대조영이 세운 나라는 ‘발해(渤海)’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이름이다. 대조영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흐른 698년 동모산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운다. 이 때 대조영은 국호를 ‘진(震)’으로 칭하였고, 대진국(大震國)이라고 불렀다.

한편 당나라는 돌궐 등의 주변 나라의 위협으로 인해 더 이상 대조영 세력을 토벌할 여력이 없었기에 712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호칭하였고, 이때 파견된 인물이 ‘선로말갈사 홍려경 최흔’이다. 최흔이 713년 당나라로 돌아가기 전 증거로 남긴 비문에는 황제의 명을 받아 발해를 비롯 말갈의 제 종족들을 만나 그들을 당의 영향력 하에 두기 위하여 두루 살피고 돌아간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 비문이 새겨진 석각은 지금 일본의 신사 한 쪽에 방치되어 있고 그것을 중국인들은 동북공정의 확실한 증거로 삼기 위하여 일본에게 되돌려 달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후부터 발해국으로 부르게 되었고, 762년에 이르러서는 발해국왕으로 격상하여 칭하였다.

발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대조영의 대진국이 단순히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발해만에 위치해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랬을까? 아니면 중국이 대진국이라는 명칭을 꺼려하면서 비하해서 부른 이름이 발해였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발해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발해라는 이름은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에도 등장하는데 위나라를 세운 조조와 자웅을 겨루었던 원소가 발해태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원소는 후한 말 인물로 동탁이 원소를 회유하기 위해서 발해지역에 살고 있던 원소에게 발해태수를 제수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중국 후한시대, 즉 1세기 전후로 중국 내에 발해라는 지명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후한(25년~220년)은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이라고도 한다. 이러한『삼국지』의 기록을 보아도 대조영이 세운 발해보다 훨씬 전인 고대에 이미 발해라는 지명이 중국 내륙에 존재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발해만에 존재한다고 해서 발해라고 부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대진국은 중국이 자신들을 발해라고 불렀음에도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를 고려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이는 대진국의 왕들이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 의해 증명된다. 그 외교문서를 보면 ‘고려국왕 대무예’ ‘고려국왕 대흠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각각 대진국의 2대 왕인 ‘무왕(武王)’과 3대 왕인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사기』「화식열전」에는 부여가 연나라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나라는 갈석(碣石)과 발해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대사에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중심 영역을 가늠할 핵심 단어로 갈석(碣石)과 패수(浿水) 그리고 발해(渤海)에 대한 위치를 증명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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