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6일.

통영시는 통영수산과학관 부지에 발해1300호 기념조형물인 ‘침묵의 영웅’ 제막식을 가졌다. 작품 ‘침묵의 영웅’은 발해 1300호 대원들의 넋을 기리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도전정신과 호연지기를 심어주기 위해 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발해를 꿈꾸는가?

▲ 민성욱 박사
발해는 698년 개국된 이래로 926년 거란에 망한 후 800여 년 간이나 우리 역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몇 줄 언급되었을 뿐이다. 『삼국사기』「최치원열전」과 『삼국유사』 「기이편」 ‘말갈과 발해조’가 그것이다.

발해가 다시 등장한 것은 멸망한 지 858년이 지난 1784년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발해고』에서다. 유득공은 발해를 창건한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점과 발해 땅이 고구려 땅이었다는 점을 들어 고려가 당연히 발해사를 편찬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후기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남북국 시대이다. 현재 역사교과서에서는 통일신라와 발해를 묶어 남북국시대로 서술함으로써 발해가 등장한다.

그런데 주변국의 역사인식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사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의 역사로 만들어버렸다. 그런가 하면 일본과 러시아도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발해를 달리 보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발해를 어떻게 보아야 되는가?

발해 1300호, 그들이 남긴 마지막 항해일지를 통해 발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16:00
나라의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오늘 한일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데
그들의 속셈이 드러난다고 보아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정신
발해정신
18:15
아직도 아무소식이 없다.
20:25
MAY DAY를 외친 후 "

이것은 고 장철수 대장이 죽음을 눈앞에 둔 1998년 1월 24일 오후 일본 해상 보안청의 구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오른손을 다쳐 왼손으로 쓴 항해일지의 마지막 장이다.

역사와 바다에서 지혜를 찾으려했던 그들의 염원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역사사랑이 곧 나라사랑임을 온 몸으로 실천한 그들, 그들의 노력이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 중요하다. 그 몫을 다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새 역사를 열어 나가야 할 것이다.

당대의 기록인 『신당서』에는 발해를 일러 해동성국이라고 부르는 기록이 있다. 해동성국은 말뜻 그대로 당시 대제국이었던 당나라 입장에서 바다 동쪽에 있는 융성한 황제국이 발해였던 것이다. 발해국이 황제국이었다는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독립된 연호를 사용한다든지, 황상이나 황후라는 표현도 그러하고, 특히 발해의 상경도성은 고구려 궁성인 안학궁의 예를 따라 축조했거나, 도성의 전체적인 평면구조가 수당(隋唐)의 장안성의 예를 따른 것도 발해가 황제의 나라임을 천하에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한국인들뿐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횡성고씨와 밀양 대씨와 태씨 등 그 외에도 다수 있다. 우선 횡성 고씨는 고구려를 개국한 동명성왕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제주 고씨와 구별하기 위해 동국 고씨 또는 고구려 고씨로 부르기도 한다.

발해가 멸망하였을 때 많은 수의 발해인들이 고려로 귀화하게 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발해 멸망 이후 고려 인구의 10% 정도가 발해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발해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태조 왕건은 태씨 성을 내려 주었고, 이 사람들은 이후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밀양대씨와 영순태씨들이다.

경상도 경산 송백리에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태씨의 집성촌이 있다. 태씨의 본관은 크게 협계와 영순으로 나뉜다. 협계태씨는 현재 전북 임실과 옥구 등지에 살고 있는데,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대부분 순절해 후손이 많지 않다고 한다. 영순태씨는 대중상의 31대손인 태순금 일족이 1592년 임진왜란 시 경북 문경시 영순면에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발해 멸망 이후 계속해서 그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200여 년 간에 걸쳐 발해 부흥운동을 했을 정도로 그 뿌리가 강했으며 지금도 조선족 일부가 그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듯 발해와 우리는 분리할 수 없다.

발해1300호, 그들에게 발해는 어떤 의미가 있었고, 발해사를 통해 알리고자 했던 발해정신은 무엇이었을까? 또 남겨진 우리에겐 발해는 어떤 의미로 와 닿고, 그 옛날 발해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는 발해정신, 그것은 고조선 이래로 면면히 이어져 왔던 홍익정신과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도전과 창조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정신이자 지혜일 것이다. 어쩌면 남북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염원을 안고 살아가는 21세기 발해인인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발해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발해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키워드가 되어 발해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1994년에 발표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를 다시 들어 본다.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소망하고 있는 게 있어
갈라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
망설일 시간에 우리를 잃어요.
(중간 생략)
언젠가 작은 나의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의 마음속엔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적 아픔과 평화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발해정신을 통해 구현되었으면 한다. 발해정신은 곧 국학으로 이어진다. 국학으로 진정 나의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고 한민족이 하나되어 진정한 인류평화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