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공주와 사랑에 빠진 고려 왕자의 이야기, 그 고려 왕자가 훗날 4대 광종이 된다.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던 그가 천 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귀추가 주목되는데, 그 대상이 발해 공주라는 점에서 더욱더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모 방송국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 등장하는 역사 소재를 두고 하는 말이다. 

 

▲ 민성욱 박사
실제 역사에서 발해 공주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몽골이 세계 정복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징키스칸 때문이었다. 그러한 징키스칸마저도 사랑에 빠지게 만든 이도 발해 공주였다. 그런가 하면 신라의 후예인 왕족과 발해의 후손인 왕비족이 세운 나라가 금나라이다. 역시 대제국을 건설한 금나라의 밑바탕에는 발해 여인들의 힘이 자리하고 있었다.
발해는 우리 역사 속에 분명 존재했던 나라이다. 그렇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아 잊고 있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에서, 또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마주하게 되는 유물로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던 발해 공주들, 그들이 남긴 역사에서 우리는 진정한 발해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고구려에 이어 대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발해는 3대 문왕 때에 이르러 역사와 문화의 꽃이 활짝 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묘의 발굴이었다. 정혜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이고 정효공주는 넷째 딸이다. 그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세상을 향해 발해의 찬란한 과거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직도 발해사가 한국사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고 대표적인 주체 세력인 말갈에 관한 역사인식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주변 국가들의 역사인식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본다. 일본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발해 연구를 시작했고, 발해와 말갈을 분리시켜 한국사에서 말갈을 배제하였다. 

지난 2014년 중국의 한 민간단체가 처음으로 일본에 문화재 반환을 요청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 이 반환 요청 문화재는 ‘홍려정각석(鴻臚井刻石)’이다. 이 ‘홍려정각석’은 당나라 현종이 713년 외교 사신인 홍려경 최흔을 요동으로 보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그 최흔이 714년 돌아오는 길에 요동반도의 끝자락인 지금의 요녕성 대련시 인근에 영원히 증거 기록으로 남기고자 우물 두 개를 파고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일본은 러일전쟁 뒤 전리품으로 그 비석을 약탈해 갔고, 현재 일본 왕궁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비석에는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동북방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던 말갈족들을 회유하고자 왔음을 밝히고 있는데, 8세기 초 당시 당나라는 동북지역에 돌궐과 거란이 그 세력이 커지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후방의 제 말갈세력들을 회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과 속말 말갈인들이 함께 세운 발해는 이에 응하지 않고 제 말갈세력들을 규합하여 대응하였으며, 2대 무왕 때에는 당나라의 등주지역을 먼저 침공하는 등 강력한 대응책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중국은 그 비석이 발해사를 설명하는 것으로 원래 말갈국이었는데, 발해군왕으로 책봉된 이래로 비로소 발해국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동북공정을 통해 알고는 있지만 여전히 발해사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의 역사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증거가 ‘홍려정각석’인 것이다. 그러니 일본에게 지속적으로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대의 기록인 비석문 조차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들의 역사기록인 『구당서』와 『신당서』의 내용을 뒷받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비문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勅持節 宣勞靺羯使 鴻臚卿 崔忻 井兩口 永爲記驗 開元二年 五月十八日”
원문을 해석하면, “황제의 신표를 갖고 조칙을 받드는 선로말갈사 홍려경 최흔은 두 개의 우물을 파서 영원히 그 증거로 남기고자 한다. 개원2년(714년) 5월 18일”

여기서 ‘선로말갈사’와 ‘홍려경’은 벼슬 이름이다. ‘선로말갈 사’는 말갈의 수고로움을 위로하는 사신을 뜻하고, ‘홍려경’은 고대 중국에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관직을 뜻한다.
핵심은 ‘선로말갈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다. 중국은 말갈국은 곧 발해국으로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기 전까지는 국호가 말갈국 이었다가 책봉이 된 이후에야 ‘발해국’이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발해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말갈족이 세운 나라로서 발해사는 중국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줄만한 기록이 앞서 언급한 『구당서』와 『신당서』가 대표적인 것이며, 한 가지 더 그들의 논리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바로 위의 비문인 것이다. 그러기에 일본으로부터 돌려받기 위하여 중국의 민간단체까지 나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발해에 대한 역사인식을 어떻게 하고 있으며, 인식의 제고를 위한 어떤 노력들을 해왔는지 뒤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49년 이후 세상에 나온 발해 공주들의 묘, 우선 정혜공주 무덤은 1949년 돈화의 계동중학과 연변대학 역사과가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에서 발굴하였다. 정혜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로 무덤에서는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돌사자 두 마리를 찾아냈고, 정혜공주 무덤은 석실봉토분(석실분, 석실묘, 돌방무덤)으로서 고구려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무덤 안에서 발견된 묘비를 통하여 3년 장을 치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고구려 문화 요소를 잘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정효공주 무덤은 1980년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발견되었다. 정효공주 무덤에는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처음으로 발해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효공주는 발해 제3대 문왕의 넷째 딸로서 757년(문왕 22년)에 태어나 792년(문왕 56년) 6월에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무덤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수향 용해촌의 서쪽에 있는 용두산에 있다. 무덤은 1980년 10월에서 12월 사이와 1981년 5월에서 6월 사이 두 차례 발굴되었다. 무덤은 벽돌로 쌓았으며, 무덤 칸의 벽면에 벽화를 그렸다. 묘지석은 1980년 발굴 시에 널길 뒤쪽에서 완전한 채로 발견되었다. 현재 묘지석은 연변자치족자치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내용은 정효공주의 출신, 공주의 지혜로움과 아름다움을 칭송한 것, 출가, 남편과 딸을 일찍 잃고 수절한 사실, 장례, 애도문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묘지석은 정혜공주 묘지와 더불어 발해인이 남긴 귀한 자료이다. 특히 발해의 국가 기틀이 확립되던 문왕대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문왕의 존호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었으며, 그가 대흥이란 연호를 사용하다가 도중에 보력으로 바꾸었고, 다시 말년에 대흥으로 복귀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 문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불러 발해에서 그가 황제적인 지위를 누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무덤의 벽화는 발해인의 모습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어 주목을 받았다.

발해가 고구려를 이은 황제국이라는 증거가 비문에 나온다. 황상, 황후 등이 그것이고 위에서 언급한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광개토태왕이 ‘영락’이라는 독립된 연호를 사용하면서 호태왕이자 영락대제로서 황제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그 뒤를 이어 발해의 문왕이 ‘대흥’이라는 독립된 연호를 사용한 것 그 또한 고구려에 이어 황제국으로서 그 면모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발해 공주가 남긴 역사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발해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엄연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황제국이었다.”
발해 건국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지배적인 세력을 형성했던 말갈도 더 이상 이민족이나 오랑캐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역사의 외연을 넓히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