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해 본 발해사 (1)
국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해 본 발해사 (1)
  • 민성욱 박사
  • culture@ikoreanspirit.com
  • 승인 2015.03.24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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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칼럼]ㅡ국학을 통해 바라본 우리 역사67 : 발해사가 한국사인 이유

며칠 전에 일본 오사카를 여행 중인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카톡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내용은 오사카 박물관에서 신라사를 설명하는 내용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신라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대충 이러 했다.
“신라는 4세기 중순경 조선반도 남동부에서 일어났고, 국가의 도읍지는 금성으로 지금의 경주이며, 당초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다가 6세기에 급속도로 세력이 확대되었다. 최종적으로는 676년에 조선반도를 통일하여 935년까지 존속하였다.”

▲ 민성욱 박사

우리 역사교과서에는 서기전 57년에 신라가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오사카 박물관에서 말하는 4세기 중순경은 356년으로 신라의 제17대 왕 내물왕의 즉위년을 의미한다. 여기서 편차가 무려 413년이나 발생한다. 이것은 일본의 한국사에 대한 역사인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은 한국사를 인식할 때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4세기 이전에 기록된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 신빙성이 없어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사를 축소시켰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역사 왜곡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일본은 글로벌시대라는 현재까지도 유독 한국사를 왜곡하려 하는가?

그런가 하면 중국도 일본 못지않게 역사 왜곡을 자행해 왔고,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고구려 및 발해뿐만 아니라 단군조선과 부여까지도 그들의 역사로 편입하였다. 왜 그토록 중국인들은 한국사를 왜곡해야만 했는가?
이미 질문 속에 그 답이 있다고 본다. 그들 모두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었고, 역사를 왜곡해야만 그들의 민족적 자존감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개인에게는 자존감이 있고, 그 자존감이 되살아 날 때 한 개인의 운명이 달라지듯 민족에게도 자존감이 있으며,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이 생길 때 민족의 자존감이 되살아난다. 우리가 민족의 자존감을 드높이려는 것은 우리 민족만이 평화롭게 잘 살자는 게 아니다. 모든 인류가, 모든 생명이 조화롭고도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게 함이다. 그러한 가치가 우리 민족에게는 있었고, 그것을 역사를 통해 구현 및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 국학을 바르게 정립하고자 하는 것도 그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살려야 한다. 우리 민족의 특성을 이야기 할 때 흔히들 말하는 것이 한과 흥이다. 한과 흥은 상반된 것이지만 결코 상반된 것만은 아니다. 한이 깊을수록 흥이 커지고, 흥이 커질수록 한도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 깊이와 높이를 함께 갖고 있었던 우리 민족, 그 흥이 제대로 살아났을 때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해 왔었다.

개인에게는 개성이 상실되면 그 인격을 높이 평가받지 못하듯 민족의 정기가 퇴색하면 그 민족의 역사마저 축소되거나 평가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민족의 정기 즉 민족의 자존감을 되살리기 위해 민족의 웅혼한 역사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 중에서도 특히 발해사가 남다른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가장 큰 나라를 이루었고 찬란하고도 뛰어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었음에도 외면당해 왔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발해사를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시대적 사명이자 역사적 과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해는 그 웅혼한 역사에 접근하는 시작점이다. 발해를 통해 고구려, 부여, 그리고 민족의 원류인 단군조선까지 연결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발해사가 왜곡되거나 역사의 단절이 생기면 고구려를 비롯하여 단군조선까지 그 원류를 밝혀내기가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발해 유적과 나라의 서고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것은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고려를 침공한 몽골, 조선을 침략한 일본 등 모든 침략국들이 가장 먼저 자행했던 것이 한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여러 서고를 다 불태웠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모르게 하여 그들 스스로 그들의 역사를 폄하하게 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이제 다시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우리의 국학을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발해사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발해사가 왜 한국사인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겠다. 발해사가 한국사인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속일본기』에 보면 728년 발해 2대 무왕이 일본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을 때 보낸 국서에,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간직하였으니, 너희 일본은 옛 고구려 때처럼 사이좋게 지내기 바란다."

라고 되어 있었고, 발해의 3대 무왕이 일본에 국서를 보낼 때 자기 자신을 ‘고려 국왕 대흠무’라고 표현 했다. 물론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둘째, 발해의 문물로 발해에는 각 집마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온돌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온돌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난방문화이다.

셋째,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무덤은 돌을 다듬어 벽을 쌓아 올리고, 천장은 모 줄임 구조(모줄임천장은 쉽게 말하면 고분 내부 공간의 모서리를 위로 올라가면서 줄여 나가는 천장을 말함)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무덤 양식은 고구려 후기 때 만들어진 굴식 돌방무덤이다.

넷째, 발해의 성벽에 있는 ‘치’다. ‘치’는 성벽에 있는 병사들이 망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방어시설로 고구려 성벽에도 ‘치’가 있었다.

다섯째,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자에 대한 기록이 『구당서』와 『신당서』가 있는데, 두 기록은 동시대 역사서임에도 서로 상반된 기록을 보여 주고 있다. 우선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 별종’으로 되어 있어 결론적으로 고구려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당서』에서는 ‘속말 말갈인’으로 되어 있어 논란은 있지만 중국 정사에 기록된 내용이라 안 믿을 수도 없다. 그래서 두 가지 기록 모두가 맞는다고 한다면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출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대조영은 말갈계 고구려인이다.” 이것은 발해 건국의 주체가 결국 고구려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여섯째, 발해의 ‘막새’가 고구려의 ‘막새’와 동일하다. ‘막새’란 기와집 지붕의 처마 끝 부분을 마무리하는 기와인데, 막새에는 꽃이나 동물 등의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고, 암막새와 수막새 두 가지가 있다. 이 중 수막새는 둥근 모양으로 발해의 수막새와 고구려의 수막새가 거의 똑같다.

일곱째, 고려의 발해 계승의식으로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를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국가는 없었다. 여기에 발해 계승국가로 고려를 상정할 수 있다. 발해도 대외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했고, 고려 또한 국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한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은 각종 자료를 근거로 여러 측면에서 입증할 수 있다. 사서는 물론이고, 신라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최치원은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는 역사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돈황문서(敦煌文書)(돈황 막고굴에서 나온 돈황문서는 '돈황학'이라는 학문까지 탄생시켰으며, 한문부터 산스크리트어, 위그루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가 모두 3만점에 이른다.)에 의하면 돌궐인들은 발해를 계속해서 Mug-lig(고구려)라고 불렀으며, 일본에서 나온 목간(木簡)에서도 발해사를 고려사로 지칭하여, 당시 돌궐이나 일본에서는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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