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이 끝나가는 날, '징비록'의 고장인 안동 하회마을을 찾아 갔다. 최근 드라마 '징비록’의 인기에 힘입어 서애 류성룡 선생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처음 찾은 곳이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썼다고 하는 ‘옥연정사’였다. 우리말에 정사와 비슷한 말이 정자가 있고 누각이 있는데, 정자와 정사는 고유한 선비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 선비들은 학문에만 정진한 것이 아니라 풍류도 즐길 줄 아는 멋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한 선비들의 학문과 풍류가 만나 자연과의 조화로움과 삶에 대한 통찰력을 심어 주었던 공간이 정자이다. 즉 선비들의 멋스러움과 꺾이지 않는 고고함이 묻어나는 곳으로 이와 비슷한 정사는 숙식이 가능했던 곳이었다. 반면 누각은

▲ 민성욱 박사
오늘날 말하자면 관청의 별관 쯤 된다고 할까. 개인을 위한 사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누각은 공적인 공간이자 정자보다 규모가 더 컸다. 우리나라 3대 누각이라면 남원의 광한루,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가 그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옥연정사’는 서애 유성룡 선생이 거기서 숙식을 하면서 ‘징비록’을 저술한 것이다. 이러한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풍광이 수려하고 한적한 마을 북담 건너에 늙으면 조용히 거처할 목적으로 1576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0년만인 1586년에 완공하여 기거하였던 가옥이었다.

화천이 마을을 시계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반대방향으로 바뀌는 옥소(玉沼)의 남쪽에 있다. 여기서 소(沼)는 늪지를 말한다. 소(沼)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사’라 부르게 된 것이다. 유유히 휘돌아 나가는 낙동강 물길과 솔숲의 향기,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하여 그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올바른 선비정신을 담고자 했던 서애 류성룡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가 있다. 선생의 자취를 따라 가다가 만나게 되는 것이 국보 132호 ‘징비록’이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맞서며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고 배려하는 정신으로 국난을 극복하신 서애 선생이 후세에 남긴 ‘징비록’이 남기고자 한 교훈을 되새기며, 느릿느릿 사색의 걸음으로 옥연정사를 거닐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애 류성룡의 업적과 그가 남긴 조일전쟁(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인 징비록을 재조명해 보고 21세기 한국인들이 준비해야 되는 ‘징비록’은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했다.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그 너머에 하회마을이 연꽃처럼 펼쳐져 있다. 여기서 유래한 부용대라는 절벽이 뒤에 자리 잡고 있다. 부용대는 태백산맥의 끝자락으로 정상에서 하회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데, 부용을 내려다보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부용은 연꽃을 말하며, 하회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렇듯 대자연이 만든 창조물을 벗 삼아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무엇을 창조하고자 하였을까? 그리고 ‘징비록’의 절대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살면서 잊고 살아야 될 것도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될 일도 있다. 우리 인생에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징비록’에서 징비(懲毖)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삼가는 것은 그저 지나간 과거를 회고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되짚어 보고 그것이 미래에 후환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경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옥연정사’의 정문인 간죽문, 거기서 내려다 본 낙동강 나룻터와 하회마을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옥연정사 앞마당에 서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는 류성룡 선생이 산에서 옮겨다 심은 것으로 수령이 455년에 이른다.
이제 서애는 역사 속에 묻혔지만 그가 남긴 정신은 ‘징비록’을 통해 남아 있다. 서애 선생은 ‘옥연정사’를 찾은 21세기 한국인들에게 행동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옥연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서당채의 이름이 세심재이다.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마루는 ‘감록헌’이라고 하는데,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푸른 물을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락재는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말로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유래된 것이다. 바로 이 원락재에서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한 것이다. 즉 '징비록'의 산실이 원락재인 것이다.‘징비록’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당시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서 전쟁의 참혹함을 온 몸으로 겪은 그가 전쟁의 참상과 전후사정을 기록한 것으로 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에 경계로 삼고자 하는 민족적 숙원이 담겨져 있다.
마루인 ‘애오헌’은 ‘나 또한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라는 도연명의 시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냥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고택처럼 보인다. 절벽과 나무와 강 그리고 바람 등 자연이 주는 풍광을 고스란히 담은 소박하면서도 절제미가 넘치는 집이다. 그 집에서 서애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남기고자 하였을까? 또 ‘징비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부용대에 올라 강을 가로질러 옥연정사 너머에 하회마을을 바라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역사 교육은 이래야 된다. 역사의 현장은 교과서 밖에 있다. 교과서 안의 역사는 정체되어 있는 역사의 단편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사실 전국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들이 살아있는 역사교과서인 것이다. 그러한 교과서는 고루하지 않다. 살아 움직여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그 가슴 뛰는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또 다른 21세기 ‘징비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징비록’의 역사적인 무대,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주는 의미, 무능하고 의심 많았던 조선의 왕, 선조가 왕위에 오른 지 25년 만에 국란을 겪게 되었고, 난세에 영웅들이 나온다고 하늘이 내린 재상, 서애 류성룡이 나왔으며, 그가 천거한 인물인 권율과 이순신 등과 함께 국정 최고의 요직에 있으면서 전란의 현장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을 이끌었다. 누구보다 전란의 참혹함과 힘없는 나라가 어떤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미리 힘을 기르지 않는다면 또다시 당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고리, 그 고리를 끊어내는 힘, 그 힘을 서애 선생은 찾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징비록’이며,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진정 무엇을 경계해야 될 것인가?
일본과 중국은 여전히 역사의 침탈을 일삼고 있는 지금, 불안한 한반도 정세를 틈타 일본은 독도영유권 주장과 함께 점차 우경화되어 가고 있다. 중국은 북한을 예의 주시하면서 유사시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 및 발해사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편입하였듯이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북한지역을 집어 삼킬 야욕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역사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그런데 16세기에 저술한 ‘징비록’의 상황과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이 다르지 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 ‘징비록’에서 등장하는 장면 중 대국 명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전전긍긍하는 선조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 16세기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의 백척간두와도 같은 조선의 정국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거기서 자꾸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미 16세기 양분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선이 어떤 결과물을 가져왔는지를 알고 있는 21세기 한국인들은 당시 정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안타까움을 넘어 답답할 수도 있다.
'피로 쓴 교훈' 조일전쟁(임진왜란) 7년의 기록은 그저 16세기의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열강에 의해 둘러싸이고 늘 함께 하면서도 그 정체를 알길 없는 북한과의 대치가 항시적으로 위협이 되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기록하게 만든다. ‘징비록’을 통해 답답하게 전개되는 조선의 정황을 보며, 우리는 21세기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予其懲而毖後患)"하고자 했던 류성룡의 통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동서 붕당으로 인한 조선통신사의 분열, 방계 출신의 왕으로 왕위 계승 과정에서 생긴 콤플렉스로 자기방어에 충실한 선조의 파천과 몽진 등을 직시함으로써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동안 주로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 조명된 조일전쟁(임진왜란)을 당시 전시 총사령관 격인 영의정 겸 도체찰사였던 류성룡의 관점에서 다시 짚어보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징비록’에서 적극적으로 해석되거나 상상된 조일전쟁(임진왜란)의 원인과 참상은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 정치에 경종을 울릴 것으로 기대된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정치적 갈등은 분열과 대립의 정쟁을 연상시킬 것이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고뇌하는 류성룡의 아픔과 개혁의지는 경제적 이유로 소홀히 했던 올바른 지도자의 덕목을 환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징비록’을 통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전쟁이 일상화된 21세기 동북아시아 정세를 통찰하는 안목까지 갖출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독도영유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해군력을 증강시켜야 할 것이다. 또 통일한국을 대비하여 중국과의 국계도 다시 정립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주춤했던 국경사 연구도 다시 박차를 가해야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21세기‘징비록’을 준비해야 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