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시대는 21세기이다. 이러한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존재했던 고조선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역사교육에서부터 찾고자 한다. 역사교육은 단순히 역사지식을 통해 상식을 넓히고자 하거나 기본 소양을 갖추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는 우리다움이 무엇인지, 그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적 자존감과 국가적 자부심을 회복하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가는 데에 필요한 원동력으로 삼기 위한 그 무엇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현실적인 문제들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이 곧 올바른 역사의식 함양으로 이어질 것이다.
 

 역사의식과 역사인식은 다르다. 역사의식은 이념적인 것이고, 역사인식은 지식적인 것이다. 올바른 역사의식 함양은 제대로 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또 인식과 인지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식은 그저 아는 것이지만 인지는 아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여기 한 아이가 울고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그리고 나이는 정확하게 몰라도 대충 연령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식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왜 울고 있는 지? 어떻게 하면 그 울음을 멈추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의 엄마는 다르다. 그 아이의 엄마는 인지를 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인식과 인지의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혹자들은 고조선을 알아서 뭐하느냐고 한다. 어디에다 써 먹을 것이냐? 무조건 우리 역사이니까 알아야 되고 이해해야 된다고 한다면 이미 역사는 한낱 역사학자의 전유물로 남게 될 가능성이 높게 된다. 우리 속담에 있듯,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느냐?”고 하겠지만 특히나, 우리 뿌리 역사인 고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은 한국사에서 어떤 시대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조선 역사는 국조인 단군왕검께서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으로 나라를 세우셨고, 이 땅에 터 잡은 이래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고대 국가를 거쳐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에 이어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르기 까지 우리 역사의 첫 출발점이며, 고유한 사유체계인 ‘홍익인간’이 그로부터 비롯되어 오늘에 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우리 역사와 문화의 원형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국학이라고 하는데,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게는 고유한 사상적 기반과 문화적 원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고조선’이고 ‘단군’인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고조선 인식이 아니라 고조선의 새로운 인식이라고 했다. 이것은 고조선이 새삼스럽게 부각되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조선 이후 우리 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단절 없이 이어져 왔던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은 정신문명의 발원지 역할을 해 왔고, 우리 민족이 전쟁 등 어려움을 겪게 될 때 마다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고조선을 왜 새롭게 인식해야 되는 가 이다. 우리 역사가 근ㆍ현대사를 거치면서 수많은 질곡을 겪어야 했고, 고조선에 대한 역사인식도 요원한 얘기로 치부되었다. 질곡의 세월을 경험하면서 역사인식은 왜곡되었지만 굴곡 많은 생을 살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역사이었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발길에 부딪히는 돌멩이, 또 바람결에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나뭇가지도 결코 예사롭지 않다. 이것들은 사실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다. 또한 평범한 일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렇듯 모든 역사는 이러한 평범한 일상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역사의 현장으로 초대할 지도 모른다. 그 흔한 돌멩이가 구석기 시대 뗀석기의 일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좀 더 정교한 신석기 시대 간석기의 일부일 수도 있으며, 또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의 일부일 수도 있다. 나뭇가지는 어떤가.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 중에서는 수백 년에서부터 수천 년에 이르기 까지 정말 오래된 인류역사의 화석과도 같은 나무들이 있다. 만약 우리가 우연히 발견한 나뭇가지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무들의 일부라면 우리는 타임머신 없이도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또한 역사이다.
 

 사소한 돌멩이와 나뭇가지도 이러한 데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우리 모두는 역사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적인 존재임을 밝힐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부모님이다. 그 부모는 또 부모님이 계셨을 테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일정한 정점에서 우리 모두는 다 만날 것이다. 그 정점이 우리 역사에서는 ‘고조선’이고 ‘단군’인 것이다. 이렇듯 역사의 공부의 진정한 목적 중 하나가 스스로 역사적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 존재임을 인식할 때 우리 역사에서 첫 역사로 일컫는 고조선의 역사는 다른 의미로 다가 올 것이다. 여기서 사관의 문제가 생긴다. 고조선 시대처럼 오래된 역사는 사료가 부족하다. 그래서 제한된 사료를 토대로 해석의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때로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나 인접학문의 도움을 받아 합리적 추론 과정이나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여기서 해석의 잣대가 되는 사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참 어려워진다. 무조건 믿을 수도, 무시할 수도 없게 된다. 여기서 혼란이 생긴다. 이러한 혼란이 우리 역사를 어렵게 만들었고, 점차 흥미를 잃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한 고조선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알아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고조선의 의미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그것이 현실일 때만 의미를 갖는다. 대중들에게 현실이란 언제나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이다. 때문에 그것은 속되고 하찮으며 일시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작지 않다. 무작위로 흘러가는 대중의 현실이야말로 세계와 우주를 가름하는 진정한 기준일지도 모른다. 철저히 개인적이면서도 항상 전체의 흐름과 함께하는 것으로 이 대중의 삶과 꿈이 얽혀 흐르는 강물이야 말로 세계의 중심이자 역사의 핵심이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의 발기인으로 알려져 있는 민족 대표 33인들은 진정한 민족 대표가 아니었다. 그들 대신에 파고다 공원에 모인 수천 명의 한국인들, 누구라고도 할 것도 없다. 이름 모를 청년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모두들 한 마음, 한 뜻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온 몸으로 싸웠다. 결국 그들의 힘으로 광복은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 고조선은 무엇인가? 그 동안 우리는 우리 역사의 주인공이지 못했다. 최소한 고조선 시대만큼은 우리가 주인공이었다. 오늘날 고조선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과거는 접어 두더라도 이제부터라도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 그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고조선이 주는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단기 4347년 7월 2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