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나?"

우리역사 속에서 처음 등장하는 교육이념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고조선의 건국이념이기도 한 ‘홍익인간’ 이다. 고조선 이후 한국사 전개 과정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형태는 달랐지만 고조선의 교육이념을 이어 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라의 ‘화랑도’ 이다. 고조선 시대에 ‘천지화랑’ 또는 ‘국자랑’이 있었다면 고구려와 신라에는 각각 ‘조의선인’과 ‘화랑’이 있었다.

신라의 교육은 ‘화랑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와 ‘국학’을 중심으로 하는 후기로 구분 된다. ‘화랑도’는 낭도들의 우두머리인 ‘화랑’을 중심으로 나라의 고유한 도를 중심으로 심신을 수련하여 국가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으며, 당시 대외 팽창에 따른 군사적 필요에 부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랑도’는 6세기 진흥왕 때 제도가 정립이 되었고, 그 이후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7세기 진평왕 때는 ‘귀산’과 ‘추항’이라는 두 화랑이 ‘원광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을 때 제시된 ‘세속오계’가 화랑들의 정신적인 밑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세속오계’는 원광법사가 600년(진평왕 22) 중국 수나라에서 돌아와 운문산 가실사에 있을 때 두 사람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던 내용으로, 사군이충(事君以忠): 나라를 섬김에 충성을 다하고, 사친이효(事親以孝):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며, 교우이신(交友以信): 벗을 사귐에 믿음으로 하고, 임전무퇴(臨戰無退): 전쟁에 나가서는 물러나지 않으며,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하라 등 다섯 가지 계율로 되어 있다. 그 뒤 귀산과 추항은 이를 잘 지켜서 602년 백제와의 아막성(阿莫城 : 지금의 남원군 운봉면)전투에서 화랑의 일원으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우다 순국하였다.

그렇다면 ‘세속오계’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세속오계는 화랑뿐만 아니라 '신라의 모든 청년들이 지켜야할 계율'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광법사가 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로서 십계(十戒)가 있는 것과 대비해서 속세의 사람들이 지켜야할 덕목으로서 세속의 오계(五戒)를 제시 했으므로 화랑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할 덕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계율은 특히 화랑들에 의하여 잘 지켜졌고 화랑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오계가 화랑들만의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원광이 가르쳤다고 해서 그의 독창적인 견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는 그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이 당대의 석학인 원광의 탁월한 식견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정리·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속오계’와 함께 신라인들의 정신을 헤아릴 수 있는 금석문이 있다. 이름하여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다. 임신서기석은 1934년 경주시 현곡면(見谷面) 금장리(金丈里)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귀중한 유물로서, 두 젊은이가 학문을 닦아 오로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서한 내용이 적혀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하늘 앞에 맹서한다. 지금부터 3년 뒤에는 충성의 도를 굳게 지켜 잘못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서약에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받을 것을 다짐한다. 만약에 나라가 편안치 못하고 크게 어지러워진다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한다. 또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다짐한 바 있는 시경, 상서, 예기, 좌전을 3년 동안 모두 익힐 것을 맹서한다.”

이렇듯 임신서기석에는 신라 젊은이들이 지녔던 이상과 포부와 염원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기록된 임신년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화랑도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진흥왕 13년(552)이나, 진평왕 34년(612) 가운데 어느 한 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 ‘충도집지과실무서(忠道執持過失无誓)’라는 구절인데, 충도(忠道)를 굳게 지켜 아무 잘못이 없기를 하늘에 맹서하는 모습은 참으로 엄숙하고 숭고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성격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싯구가 떠오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임신서기석에 나오는 두 젊은이는 맹서의 내용으로 볼 때 화랑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래서 비석의 제작 연대도 화랑들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던 시기일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세속오계’와 ‘임신서기석’을 통해서 볼 때 당시 신라인들의 정신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라 말 석학 최치원은 신라의 고유정신 내지 고유사상을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국유현묘지도 왈풍류(國有玄妙之道 曰風流)" 즉 풍류(風流)라고 이름 하였다. 나아가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라고 하여 풍류에는 이미 유불선의 개념이 내포 및 내재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와도 분명히 구별되는 우리의 독자적인 고유한 도(道)임을 밝혔다.

또한『삼국유사』에서는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먼저 풍월도가 필요하다고 하여 양가(良家)의 남자 중에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화랑이라 하고 설원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작이다.”라고 하여 ‘화랑도’가 선(仙)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선인왕검(仙人王儉)은 단군으로 볼 수 있으므로 고유한 선(仙)사상은 우리역사의 처음부터 있어 온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풍류(風流)는 바람이 흐르듯 '신과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 한다. 이렇듯 하늘을 숭배하고 하늘과 소통하고자 하였던 신라인들, 그러한 신라인들을 잘 설명하는 유적이 여럿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사치 향락 문화로 잘못 알려진 ‘포석정’이다. ‘포석정’은 포석이라는 명문기와가 발견됨으로써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포석사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단순히 왕과 귀족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신라 시조 묘와 나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성한 장소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포석정은 하늘의 별자리 모양으로, 곧 하늘 정원이라는 주장이 있고, 따라서 포석정은 후대에 향락 위주로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원 취지는 하늘의 별자리가 지상에 내려와 신들의 정원을 표현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포석정은 '신과 인간과 자연'의 소통으로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풍류는 ‘바람이 흐르다’는 말 뜻 그대로 자유로이 그리고 바람이 되고 달이 되어(風月), '신과 인간과 자연'의 진정하고 참된 소통과 하나 됨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정신문화를 통해서 볼 때 화랑도(花郞徒)는 진흥왕이 불교 등 외래종교의 전파 속에서 나라를 흥하게 하기 위해서는 귀족과 백성들의 지지가 필요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라의 뿌리 깊은 고유 신앙이자 종교에 대한 균형잡힌 정책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창설되었으며, 고유한 도(道)인 풍류를 실천하는, 종교성을 띠는 청소년 수련단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랑의 도(道)인 화랑도(花郞道)는 종교적인 풍류도(風流道)이고, 화랑정신은 '신과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고 교감하고 하나가 되는' 풍류정신이 본질이고, 무사정신은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던 그 시대 상황에서 나온 부분적인 현상인 것이다. 모든 부분에서 궁극의 경지를 추구하려는 것이 풍류의 참모습이라고 할 때, 모든 분야에서 과학이든 문화이든 예술이든 신과 교감하는 정도의 궁극을 지향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신라정신인 ‘풍류’에서 찾아야 하는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 본 ‘세속오계’와 ‘임신서기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서약의 대상이 하늘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늘에 대한 믿음은 우리 민족의 토착적인 신앙으로서 그 연원이 참으로 오래고 깊다. 인간의 능력이 닿지 않고,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절대의 세계가 바로 하늘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존재인 ‘하늘’을 대상으로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서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외래 종교인 불교 혹은 유교의 영향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내재해 온 고유한 가치관이 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하늘을 숭배하고, 하늘을 닮아 밝고 환해지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삶의 목적이 ‘인격완성’ 혹은 ‘홍익인간’에 있었으며, 그러한 인재를 국가적으로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 ‘화랑도’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들의 역할은 역사 속에서 발견한 신라인들의 정신을 통해 올바른 역사관과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 민성욱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