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체로서의 남한산성은 어떤 모습일까? 역사경에 비춰진 남한산성 을 스케치 해 본다.

망원경은 멀리있는 물체의 상(像)을 크게 보이도록 만든 기구라면 역사경은 지나 간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망원경은 그저 보이는 것이지만 역사경은 그냥은 보이지 않는다. 보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인식하는 역사관이 중요하다. 이러한 역사경에는 정적 역사경과 동적 역사경이 있다. 정적 역사경은 공간적 배경을 고정해 놓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을 살펴보는 것이고, 동적 역사경은 ENG 카메라와 유사하다. ENG 카메라는 전자장치에 의해 뉴스 영상을 취재할 수 있는 카메라이다. 즉 공간적 배경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을 따라 다니면서 역사의 현장을 취재하듯 보여 주는 것이다.

우선 기록을 통해서 본 남한산성을 스케치 해 보기로 한다. 기록으로 본 남한산성의 모습은 어떨까? 생각보다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서기전 백제 건국당시부터 대일항쟁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백제 온조왕 때 기록이다. 『삼국사기』권 제23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溫祚王) 13년(서기전 6년) 가을 7월에, "한산(漢山)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백제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옮긴 이후에 나오는 한산은 현재의 남한산(南漢山)을 가리킨다. 이 한산은 후기 신라기에는 남한산(南漢山)으로 불리다가 조선 광해군 때에 와서 남한산성으로 불려 졌다. 백제가 새로이 도읍을 정한 곳에 대해 『삼국유사』 권1 왕력편 및 같은 책 권2 기이편 남부여ㆍ전백제조에는 "병진 이도한산 금광주(丙辰 移都漢山 今廣州)"라 하여 경기도 광주로 나온다.

다음은 신라 문무왕 때 기록이다. 『삼국사기』권제7 「신라본기」문무왕(文武王) 12년(672년) 가을 8월,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는 4,360보(步)였다."

여기서 한산주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의 일부를 다스렸던 신라의 행정구역으로, 진흥왕 14년(553)에 신주(新州)가 설치된 이래, 북한산주(北漢山州), 남천주(南川州)로 바뀌었다가 북한산주로 다시 불렀으며,  뒤 한산주로 불렀다.  주장성은 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전대의 역사를 이어 고려시대에도 남한산성의 역사가 이어짐을 보여 준다. 『고려사』 권56 지 10, 지리 1, 양광도(광주목), "처음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3년(서기전 18년)에 나라를 세우고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13년에 이르러 한산 아래로 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이주시킨 다음 궁궐을 짓고 그곳에 살았다. 이듬해 도읍을 옮겨 남한산성이라고 불렀다. 근초고왕 25년(370)에 이르러 도읍을 남평양성으로 옮겼다. 이후 신라 태종왕(무열왕)이 김유신을 보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뒤에 당나라의 군대가 돌아가자 문무왕이 점차 그 땅을 수복해 한산주로 이름을 고쳤으며, 다시 남한산주로 고쳤다. 경덕왕 15년(756)에 이름을 한주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성종 2년(983)에 처음으로 12목(牧)을 설치하면서 한주도 그 중 한 목(牧)이 되었다."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6 광주 고적(古跡)조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은 곧 신라의 주장산성(晝長山城)을 말하는 것으로 문무왕 때 축성한 것으로 그 내부에는 6개의 우물이 있는데 모두 시내(溪)로 이어졌고 둘레는 팔만육천팔백척이며, 높이는 이십사척에 이르는 석축(石築)이라 하였다.” 이때 주장산성은 현재의 남한산성의 전신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 등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이와는 별개로 구전되어 오던 전설이나 설화도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백제 온조왕과 남한산성을 쌓는데 큰 공을 세운 완풍부원군 이서를 함께 모신 사당인 '숭렬전'에 얽힌 이야기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울 때 일이다. 밤이 깊도록 청나라 군사와 대치하는 군사들을 돌아 보다가 몹시 피곤한 나머지 깜빡 잠이 든 인조는 예사롭지 않은 꿈을 꾸게 된다. 어떤 노인이 꿈에 나타나 “적이 높은 사다리를 타고 북성을 오르고 있는데 어째서 막지 않고 있는 가?” 라고 호통을 친 것이다. 노인의 정체가 궁금했던 인조가 그의 이름을 물었고 , 노인은 저신이 성주 온조왕이라고 했다. 잠에서 깬 인조는 즉시 북성 근처를 정탐하게 했는데, 놀랍게도 청나라 군사가 북성 벽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발견한 조선의 군사들은 엄청난 수의 청나라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인조는 온조왕의 은혜를 갚기 위해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사당을 짓고 봄과 가을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
 

그런데 인조가 제사를 올린 지 며칠 지난 어느 날 온조왕이 또 다시 인조의 꿈에 나타났다. "대왕이 내 사당을 지어 주었으니 진실로 고맙소. 그러나 혼자 있기가 몹시 외로우니 대왕의 신하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 한 사람을 나에게 보내 주시오." 온조왕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잠에서 깬 인조는 간밤의 꿈을 이상히 여겼는데, 잠시 후 산성을 쌓는데 크게 기여한 이서가 간밤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인조는 이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님을 알고 이서를 온조왕을 모신 사당에 함께 배향하게 했다. 원래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년)에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린 뒤 숭렬전으로 불리고 있으며, 백제를 건국한 온조대왕과 남한산성의 축성 총책임자였던 이서 장군의 혼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춘계(음력 2월 초정일)와 추계(음력 8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밖에도 남한산성 축성 중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된 이회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청량당’과 ‘매바위’에 얽힌 이야기와 임금의 옷인 곤룡포를 하사받은 ‘서흔남’의 이야기 등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렇듯 남한산성은 많은 역사와 이야기들을 품고 있어 남한산성 곳곳에 숨어있는 역사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도 분명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이 도읍지로 정한 이래로 신라 문무왕 때 축성된 주장성터를 활용하여 조선시대 때인 1626년(인조 4년)에 축성되었고 남한산성이 일상적인 왕궁과는 다른 산성이면서 병자호란에서는 왕이 거주하는 비상 왕궁이 되었다. 남한산성이 단순히 문화유산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무형유산의 무대이기도 하였는데, 남한산성 주변 마을에 전래하는 제사 민간 신앙인 엄미리 장승제를 중심으로 검복리와 하번천리 장승제, 광지원리의 해동화놀이, 불당리의 지신밟기 등이 있다. 1925년 최영년이 편집한 시집인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나오는 남한산성 내 토속음식인 효종갱에 대한 기록에서 출발해 남한산성에서 전승되어 왔던 다양한 음식문화가 남아있고, 조선후기 천주교인들이 남한산성에서 옥살이 했었고 백제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숭렬전과 병자호란의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모신 현절사가 있으며, 불교의 사찰하고도 많은 연관이 있다.

경기도 광주 산맥자락에 있는 남한산성의 남문, 본래 이름은 자화문이다.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 때 처음 쌓았고 병자호란 때는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는데 그때 남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남한산성의 석축은 다듬은 돌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연석을 이용해서 만들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오랜 역사를 가진 것도 놀랍다.

과거에는 남한산성이 우리를 지켰지만 이제는 우리가 남한산성을 지킬 때이다. 달빛이 아름다운 산성이고, 총길이가 12Km나 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최대 산성이며, 지나온 세월만큼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왔던 남한산성을 정성어린 관심으로 잘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고즈넉한 남한산성에 조용히 홀로 앉아 자연이 숨 쉬는 흙길과 호흡하고 그림 병풍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싶다. 아름다운 자연의 향연, 그것을 과거 조선의 왕, 인조도 보았을 것이다. 수줍지만 조용히 고개를 내밀어 고운 잎을 자랑하는 나무들, 담벼락에는 어느새 자연이 선사한 한 폭의 그림이 기다리고 있다.

분명 시대별로 남한산성의 의미는 달랐을 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나? 세계유산에 등재되기에 남한산성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단순한 관심에 그칠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를 드높이는 차원에서 남한산성에 대한 오랜 관념에서 벗어나 고대부터 현대까지 흐르는 역사의 도도한 물결과 그 한가운데에 있는 남한산성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