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별에서 또 다른 별로 이동할 때 ‘스타게이트’가 있다면, 역사 공간에서 다른 역사로 이동할 때는 ‘역사게이트’가 있어야 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러한 ‘역사게이트’가 존재한다면 참으로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역사의 구성요소에는 공간적ㆍ시간적 배경 그리고 인물이 있고 그 세 가지가 창조해내는 사건이 있다. 역사의 무대는 동일한 곳이지만 시간적 배경과 인물 그리고 사건에 따라 전혀 다른 결말로 이어지기도 한다. 각 시대의 역사로 넘어갈 수 있는 출입문인 ‘역사게이트’는 다양한 시대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窓이기도 하다.

만약 서로 다른 시대에 존재했던 인물과 사건이 모두 한 곳에 배치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역사의 혼란이 빚어질 것이다. 그러한 혼란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역사의 문’ 이다. 백제의 온조왕, 신라의 문무왕, 조선의 인조가 한 자리에 모여 ‘남한산성’을 주제로 토론을 한다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역사는 과거를 설명하려 하지만 그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과거를 통해 오늘을 해석하고 내일을 설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곧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남한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석굴암ㆍ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 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ㆍ화순ㆍ강화 고인돌 유적,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위의 유산들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자연 및 문화유산들이다. 다음 차례인 11 번째로 등재될 우리 유산이 바로 남한산성이다. 물론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6월 15일부터 25일 까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2014년 유네스코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될 예정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에 대한 평가 결과 보고서’에서 남한산성을 ‘등재 권고’로 평가하여 유네스코(UNESCO)에 제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평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에서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증거로서의 군사유산이라는 점과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전술의 시대별 층위가 결집된 초대형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라는 점 등이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고, 또 효과적인 법적 보호 체계와 보존 정책을 비롯하여 현장에서의 체계적인 보존관리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는 것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된 이유라고 한다.

여기서 ICOMOS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심사자문기구로서, 세계유산 등재 신청 유산에 대해, 신청서 심사와 현지 실사를 통해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4가지 요건(① 탁월한 보편적 가치 ② 완전성 ③ 진정성 ④ 보존관리 체계)의 충족 여부를 심사하고, 등재 가능성을 판단하여 유네스코 앞으로 최종 평가서를 제출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의 문인 남한산성이 영광사와 수난사를 넘나들면서 역사의 진실과는 다르게 왜곡되었을 수도, 우리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진정한 역사의 평가도, 의미도 아닐 것이다.

남한산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에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에 종료된 청의 조선 침략 전쟁이다. 1592년의 임진왜란,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인해 이미 쇠락해진 조선은 청이 침략한 지 두 달여 만에 항복하고 만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은 청군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려든다. 청군의 가공할 기동력과 전투력을 감당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45일 만에 항복했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즉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을 행했다. 우리 역사상 굴욕적인 항복조인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더욱 처참했다. 5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청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비싼 속환가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어려웠지만 돌아온 후에도 ‘환향녀(화냥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렇게 병자호란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조국’마저 앗아갔던 것이다.

병자호란에 대한 강렬한 기억으로 인한 남한산성에 대한 관념들이 존재하고 있다. 과거에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하는 패전의 멍에를 씌워 놓았고 현재는 등산과 닭볶음탕이 유명하다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면 인식이 달라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만으로 끝나면 안 될 것이다. 세계유산이라는 위상에 부합되는 관리도 중요하고 나아가 남한산성 자체가 갖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남한산성은 국가 사적 제57호로 해발 500미터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가 12Km나 되는 성벽을 구축하고 있어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 간 항전한 곳으로 결코 성이 함락되지는 않았다. 다만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더 이상 성 안에서 버티기가 힘들었고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어 강화도로 피신했던 세자와 세자빈 등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고 있었기에 모든 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인조가 항복을 결심하고 송파 나루인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 조인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한산성의 가치를 말할 때 크게 역사적, 문화적, 자연적 가치로 나눠 이야기하는 데, 우선 역사적으로 보면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으로부터 신라 문무왕을 거쳐 고려 태조와 성종 대에 이르러 지금의 지명을 얻게 되었으며, 조선 인조 때 다시 축성을 하였고 병자호란의 전란 속에서도 굳건하게 지킨 성이었다. 그러기에 남한산성은 여러 시대에 걸쳐서 한강유역과 수도에 대한 방어 기능을 담당했던 곳으로 단 한 번도 함락당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장소인 것이다. 한편 남한산성은 항일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말 의병장 김하락은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주, 이천, 안성, 연천 등지에서 항쟁했다. 그는 여주 의병장 심상희와 합세해 연합병력 2,000여 명으로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진을 옮겨 대일항쟁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시대별 다양한 축성기법이 남아 있기도 하다. 12Km에 당하는 성곽에 조선시대 인조, 숙종, 영조, 정조 때의 축성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성곽발달사의 표본이 되고 있다. 이것과 함께 남한산성 안에 있는 행궁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행궁이란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르는 별궁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 20여 개의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곳으로 국가전란 시 임시 수도의 역할을 담당케 했다.

다음 문화적 가치로는 조선 최대 산성 도시였던 남한산성에는 다양한 종교 문화와 유적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유교, 불교, 천주교, 민속신앙 등 여러 종교가 이어져 오고 있다. 즉 남한산성 안에 있는 숭렬전과 현절사에서는 매년 유교 예법에 따라 제향식이 거행되고, 불교는 조선시대 10개 사찰 가운데 네 곳이 명맥을 이어 오고 있으며, 천주교 순교 성지로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가 하면 매년 대동굿도 진행되고 있다. 남한산성에는 산성소주와 효종갱 같은 이곳에서만 전승되는 독특한 음식과 다수의 한시, 고서, 설화 등 문화예술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가하면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자연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높고 낮은 봉우리가 이어진 계곡이 많고 물이 맑아 가재나 도룡뇽 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또한 울창한 소나무 군락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생태계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남한산성의 역사적, 문화적, 자연적 가치는 우리의 지식보다, 우리의 생각보다 크다. 다양한 역사와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남한산성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세계유산 등재보다도 더 중요하다. 다시 한 번 남한산성의 본질적인 가치를 생각해 본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門으로서, 때로는 역사의 窓으로서 남한산성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의미일 것이다.

 

단기 4347년 6월 9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