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힘을 발휘한 우리 역사', 개혁 군주 ‘정조’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1세기는 정보통신의 시대이다. 그래서 소통과 교류가 강조되곤 한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소통지수는 어느 정도 될까? 4.16 참사라고 하는 세월호 여객선 침몰 사고는 어쩌면 대한민국의 소통지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참사였다고 할 수 있다. 배가 출항을 하고 나면 선장과 선원 그리고 탑승객들 모두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된다. 그러한 운명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그 배의 운명은 가늠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세월호와 비교하게 되는 영국 타이타닉호에서는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악단까지도 끝까지 제 역할을 하고 침몰되는 배와 운명을 같이 했다.타이타닉호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로 전문가들은 선장의 책임감있는 리더십을 먼저 꼽는다. 그가 바로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이다. 침몰 당시 스미스 선장은 어린이, 여성, 남성 순으로 탈출하도록 질서를 유지시켰다. 자신은 끝까지 키를 움켜잡은 채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 102년 전 타이타닉호 선장이 보여 준 영국인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1852년 2월 26일 새벽 2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남단 케이프타운 근처 바다에서 영국 해군 수송선 ‘버큰헤드호(HMS Birkenhead)’가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때 함장 '알렉산더 세튼' 대령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동안 우리를 위해 희생해 온 가족들을 우리가 지킬 때다. 어린이와 여자부터 탈출시켜라." 그 말을 들은 470여 군인들은 함장의 구령에 의해 구명보트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며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여기에서부터 위기 때 약자를 배려하는 '버큰헤드 정신'이 영국인들의 전통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 사건 이 후로 영국인들은 그 어떤 사고가 터져도 "버큰헤드 정신으로" 라고 외친다. 이 말 한마디로 우왕좌왕하던 이들도 곧 숙연해 지고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버큰헤드 정신"​이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때에도 빛을 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어느 사회 어느 집단이든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 혹은 정신이 살아 있을 때 그 조직은 정체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으며, 그 바탕에는 소통의 리더십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침몰 사고를 통해 실추된 한국인의 정신은 무엇인가? 이번 기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신을 점검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한다. 사고 초기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았던 해경, 서로 책임전가하기 바빴던 정부 당국, 배를 끝까지 책임져야 할 선장과 선원들은 배와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한 정황들을 통해 우리는 그 날의 사건ㆍ사고를 책임져야 하는 당사자는 역설적으로 희생자 혹은 실종자 가족들이 되어야 하는 서글픈 현실을 대면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도 믿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얼마 전 지하철 사고가 났을 때 안내 방송으로 안전한 객차 안에서 대기하라고 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객차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우리의 모습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국가와 민족을 말할 때 그 바탕에는 정신적 기반이 깔려 있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한문화’가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홍익인간’의 정신이 건국이념이 되고 통치이념이 되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이 되었다. 이러한 ‘한문화’와 ‘홍익인간’의 정신이 점차 사라지고 외래사상과 종교가 주객이 전도되듯 주인 노릇을 하면서 우리 역사는 수난과 핍박의 역사를 거듭해 왔다. 아직도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지역 계층 간의 갈등과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는 잃어버린 우리의 얼굴을 되찾을 때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얼굴이란 ‘얼’ 혹은 ‘정신’이 드나드는 굴이란 뜻으로 우리 얼의 진정한 모습인 ‘한얼’을 의미한다.

‘한얼’에서 ‘한’은 순수 우리말로 하나, 크다, 많다 등 다양한 뜻을 갖고 있고, ‘얼’은 곧 정신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굳이 풀이 하자면 ‘우주 근원의 자리에서는 모든 생명과 만물이 하나라는 믿음과 그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철학과 사상을 기반으로 한 문화가 ‘한문화’이고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이기도 한 ‘홍익인간’ 정신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우리 역사는 이러한 ‘한문화’와 ‘홍익인간’ 정신을 계승 및 발전시켜 왔고 그것을 잘 지키고 유지했을 때는 세계를 주도하는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심지어 국권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으면서 나약한 나라로 전락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의 명암이 갈리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 소통의 리더십으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과 나라를 살렸던 왕들 중 정말 드라마와 같은 일생을 살았던 그래서 끊임없이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 정조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조선왕조에서 대왕이라고 부를만한 왕은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 계신다. 두 분의 업적과 역할은 달랐겠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백성들과 소통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고 실제로 소통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 주신 분들이었다. 특히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적었다는 일기, 『일성록(日省錄)』을 통하여 하루에 세 번 반성했다고 한다. 증자의 『논어』 중 ‘日三省吾身’ 나는 매일 나 자신을 세 번씩 반성한다는 뜻의 ‘일삼성오신’이라는 글귀에서 감동을 받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던 조선 22대 임금 정조, 한 나라 최고 통치자인 왕이 일기를 매일 쓴다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하루에 세 번 스스로 자기 반성을 했다고 하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러한 기록의 가치가 인정되어 『일성록』은 2011년도에 5.18 민주화운동기록물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매일 스스로를 반성하며 백성의 평안을 빌었던 지도자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일성록』,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뒤돌아 볼 줄 알아야 민생을 챙길 수 있다고 믿었던 백성을 한없이 마음으로 사랑했던 정조의 기록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소통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고 중요한 지 알 수가 있다.

또한 정조는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고 싶어 했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사건이 있다. 멀고 먼 흑산도의 평범한 백성, ‘김이수’가 정조를 만나 흑산도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했다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당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여러 기록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임금이 되자마자 뒤주에 갇혀 비운의 죽음을 맞았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현륭원으로 옮기고 자주 능행했다. 효심이 지극한 정조의 능행은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사안이었다. 특히 사도세자 죽음을 주장했던 당시 집권층 노론들은 임금의 능행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그들에 대한 정조의 견제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이러한 능행을 정조는 가능한 한 많은 백성들이 구경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은 백성들과 직접 만나고 싶었던 정조의 진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정조는 수원에 도착했다가 환궁할 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지시를 내렸다.
“현륭원 입구에서 숭례문까지 상언을 받도록 하라.” 환궁 길에 백성들의 민원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상소를 올리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격쟁을 하라고 허락한 것이다. 여기서 ‘격쟁’이란 꽹과리를 쳐서 왕의 이목을 끈 다음 백성들이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이었다. 정조는 즉위 하자마자 궐내에서는 물론 자신의 행차 길에 이러한 격쟁을 적극적으로 허용했다. 이렇듯 임금에게 민원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된 정조의 행차는 백성들에게는 축제와도 같았다.

1791년 1월 18일, 사건 당일 환궁 길에 오르는 정조의 행차, 흑산도주민 ‘김이수’는 수원 능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정조 임금을 그날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흑산도 주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임금께 고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흑산도 주민들의 억울한 사정이란 무엇이었을까? 당시 흑산도 주민들은 가혹한 세금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여기에 흑산도 주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종이 세금까지 부과된 것이었다. 당시 흑산도 성인 남자 한 사람이 바쳐야 하는 종이 세금은 닥나무 40근에 해당하는 종이로 남자가 많은 집은 생업을 포기하고 닥나무를 캐다가 종이를 만들어도 세금을 충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계속 닥나무를 베어다 종이를 만들다 보니 땅은 척박해지고 닥나무도 바닥이 났다. 그럼에도 관에서는 여전히 종이 세금을 거둬들였다. 이 무렵 ‘김이수’는 임금에게 직접 민원을 호소하는 격쟁 제도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혈혈단신 한양 길에 올라 마침내 임금의 행차를 가로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행차 중에 접수된 격쟁 내용은 3일 이내로 조치하는 것이 정조의 원칙이었다. 정조는 아무리 늦게 궁궐에 도착하더라도 격쟁과 상언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그것을 먼저 처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4개월 후인 5월 22일 이른 새벽, 정조는 김이수가 격쟁한 흑산도 문제에 대한 현장 조사 결과를 보고 다음과 같이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정조」제32권,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5월 22일(병신) 1번째 기사,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흑산도(黑山島) 백성들이 양향청(糧餉廳)에 바치는 닥나무의 폐단으로 징을 쳐 원통함을 호소한 일로 아뢰기를, ‘본도는 땅이 척박하여 닥나무의 뿌리가 거의 없어졌는데, 매번 종이를 뜨는 일이 생길 때면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에게 닥나무 껍질 1만 2천 9백 근의 대가로 돈 5백 냥을 규정으로 정해 받아들이는 것이 잘못된 규례가 되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외딴섬의 민폐를 변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종이 나는 곳으로 지정한 것을 영원히 혁파해 주고 양향청에서 쓰는 것은 호조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

정조는 흑산도 닥나무 세금의 폐지를 결정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정조가 추구하였던 왕도 정치와 백성과 소통하고자 하였던 그의 철학이었다. 국토의 서남단 끝, 흑산도에서 온 평범한 주민 ‘김이수’가 왕을 움직였고, 왕은 그것을 소홀히 하지 않고 흑산도 주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었다. 이것은 우리 역사가 보여 준 소통의 힘이자 소통의 리더십인 것이다.

4.16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면서 진정한 한국인들의 정신이 다시 한 번 발현되기를 바라면서 소통의 힘을 알고 소통의 리더십으로 백성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개혁 군주, ‘정조’를 생각하게 된다. 최근 정조 시대에 있었던 사건, ‘정유역변(丁酉逆變)’을 소재로 한 영화 ‘역린(逆鱗)’이 개봉되어 상영 중이다. 영화 ‘역린’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대사가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 영화가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내용인 것 같다.

“작은 일에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나오고, 겉에 배어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신이 되살아나서 새로운 변화에 대한 희망을 우리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단기 4347년 5월 19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