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달걀 한 판을 꽉 채웠다. 음력설까지 지났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서른이 된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아직 만으로는…"이라고 말했다가 뭇매를 맞았다.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사이'임을 인정하라나 뭐라나. 나의 서른을 가장 발랄하게 맞이해 준 것은 나보다 몇 해 앞서 서른을 맞았던 한 선배였다. 그녀는 지난해 송년회 자리에서 나에게 보내는 노래라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친히 불러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했고 나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홉수니까 그래~"라는 말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서른 앓이'가 시작되었다. 무엇이든 용서되는 20대의 치기를 부리기에는 이제 '나잇값'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포스터에서부터 '코미디 영화' 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그저 웃고 끝나는 영화는 아니다. 생각해볼 것도, 생각하게 되는 것도 있는 영화였다.

 그러던 중 영화 <수상한 그녀>를 보게 되었다. 영화 속 오말순(나문희 분) 여사는 그리 본받고 싶은 어른은 아니다. 칠순을 넘긴 그녀의 입에서는 차진 육두문자가 쉴 새 없고 동네 노인들이 모이는 실버카페에서는 아무도 못 말리는 싸움꾼이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고생 끝에 키워낸 교수 아들이 그녀의 유일한 자랑거리이자 인생 최고의 상패다. 그런 아들의 짝인 며느리는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문제의 시작은 며느리의 건강이 악화되면서부터다. 건강 악화의 원인이 심각한 스트레스인데, 그 스트레스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오말순 여사였던 것. 가족들은 몸도 정신도 건강한 그녀를 요양원으로 보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실의에 빠진 오말순 여사가 영정 사진이라도 곱게 찍자며 찾아간 '청춘사진관'에서 일이 벌어진다. 칠순 노인이 스무 살 꽃처녀가 된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재기발랄하다. 칠순 할머니가 스무 살 꽃처녀 오두리(심은경 분)로 변신했으니 얼마나 유쾌하겠는가. 몸은 스무 살인데 말이며 행동은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하고 있으니 그 의외성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다 큰 총각들을 칭찬하겠다며 엉덩이를 토닥이는가 하면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앳된 얼굴로 질펀한 육두문자를 맛깔나게 구사한다.

▲ 칠순 할매 '오말순 여사'(왼쪽, 나문희 분)와 스무 살 꽃처녀 '오두리 양'(심은경 분)

 하지만 유쾌함은 거기 까지다. 꽃처녀로 살아가는 그녀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뭇남성들의 관심과 애정도 한 몸에 받는다. 한때는 이렇게나 반짝이며 빛났던 그녀였다.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칠순의 오말순 여사는 가족들이 치워버리고 싶은 늙고 빛바랜 존재가 되어버리다니 말이다.

 게다가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 다시 살게 하는 것이 '판타지(fantasy)'라는 것은 더욱 서글프다. 오늘날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나이 듦'의 서글픔을 해결할 방법이 '젊음'으로 가는 판타지라니 말이다. 그런 영화인 줄 알고서 봤는데도 아쉬웠다. 신데렐라에게 마법사가 없었다면 왕자를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지도 못 했을 것이 아닌가. '청춘사진관' 없는 오말순 여사에게 가족 간의 화해와 다시 살아갈 희망이 생겨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지금 당신의 나이가 몇 살이든,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인생의 가장 젊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엄청난 신약이 발명된다면 모르지만, 판타지 없는 현실 속에서 오말순 여사가 오두리 양이 되는 것은 꽤나 요원한 일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영화 <은교>의 주인공인 시인 이적요(박해일 분)의 대사 한 마디가 마음에 남는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이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