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널리 모든 세상을 이롭게 하는 단군의 홍익정신을 지금도 실천하지 못하고, 예수의 사랑과 부처의 자비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단군과 예수와 부처의 말씀이 어렵고 힘들어서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군과 예수와 부처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번뇌를 여의신 상태에서 홍익정신과 사랑과 자비를 말씀하시만 우리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망상을 지닌 채로 말씀을 듣다 보니 참된 홍익정신과 사랑과 자비를 알지 못하여 실현되지 않고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미혹한 생각을 여의면 홍익과 사랑과 자비는 스스로 실천됩니다.

조주 선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싫어하고 좋아하는 번뇌 망상이 없는 본래의 우리 마음인 참된 마음인 본분사(本分事)로 모든 사람을 대한다. 만약 내가 깨달음의 여부가 되는 근기(根機)에 따라 사람들을 각기 대한다면 팔만사천대장경으로 벌어지느니라.”

조주 선사가 본래 좋아하고 싫어하는 번뇌 망상이 없는 참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한다고 함은 티끌 수와 같은 일체중생이 본래부터 이 마음의 부처이고, 홍익인간이며, 사랑의 예수이기 때문에 모두 본래 부처 곧 본분사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본분사로 대하지 않고 번뇌 망상을 여읜 정도와 깨달음을 이룬 한도가 되는 근기에 따라서 사람들을 대하고 말을 한다면 팔만사천 가지 말을 해야 하고 팔만사천 근기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마음을 크게 깨치신 후에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는 설명의 여러 말씀이 팔만사천대장경입니다. 따라서 일체중생이 바로 이 마음의 부처라는 본분사를 알고 실천해나가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근기에 따라 설법한 팔만사천대장경을 재차 언급할 필요가 없기때문에 그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깨닫지 못하여 이 마음이 본래 부처이고, 홍익인간이며, 참사랑이라는 것을 모를 때 싫어하는 중생이 좋아하는 부처가 있고, 홍익인간과 홍익이 아닌 인간과 예수와 악마가 있을 뿐입니다. 참마음의 본래 자리에는 중생과 부처, 홍익인간과 홍익 아닌 인간, 악마와 천사가 어느 곳에 따로 있을 수 없으며, 싫어하고 좋아함이 없는 참마음의 자리에는 고통과 즐거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깨닫기 전에 수행이 있고 기도, 염불, 화두, 명상이라는 수도가 있는 것이지 깨달은 후에 무슨 수도수행이 있겠습니까?

번뇌와 고통이 없는 참마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 우리의 고민으로 자녀교육, 학교폭력, 가정불화, 빈부격차, 정치가들의 위선 등 수많은 사회문제로 인한 고통이 있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또한 좋아하는 즐거움을 얻으려 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마음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 해결책이기 때문에 모든 사회문제는 또다시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토록 소중한 부모님과 자식과 몸뚱이가 티끌과 원자로서 그대로 이 마음이고, 이 마음이 그대로 티끌과 원자로서 부모님과 자식과 몸뚱이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부모님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여의고, 소중한 자식과 내 몸뚱이를 두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여의시고 지혜의 도리를 깨달은 조사 스님들의 행적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황벽 선사의 어머니는 선사를 찾아 먼 길을 나섰습니다. 먼 길을 몇 달을 걷고 또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선사가 있는 절에 도착하였습니다. 잠시 후 어느 방 앞에 이르렀을 때 방 안에서 나는 선사의 대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도 기쁜 마음을 추스르고 “스님” 하고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두 번, 세 번 계속 스님하고 불렀으나 끝내 방안에서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불러도 또 불러도 대답이 없자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방에 있던 황벽 선사는 주위 사람들에게 누구도 나의 어머니에게 물 한 방울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선사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절을 떠나 어느 강가에 이르러 너무도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사무쳐서 넓은 바위에 엎어져 그만 숨을 거뒀습니다. 그날 밤 황벽 선사의 꿈에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나타난 어머니는 선사에게 큰 절을 세 번 하고 말했습니다.

“오늘 낮에 만약 스님에게 물 한 방울이라도 얻어 마셨다면 내가 지옥에 떨어졌을 것인데 스님 덕분으로 도리천(忉利天)의 천상에 태어났습니다.”

황벽 선사가 먼 길을 오신 사랑하는 어머니를 그냥 보내면 어머니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위로하고 대접했다면 어머니는 기쁘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선사를 대견하게 여기고 자랑하는 마음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자식 간의 업을 이어 갔다면 필시 지옥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러도 한 마디 대답도 없고 물 한 방울도 주지 않는 선사가 너무도 야속해 모자간의 모든 정, 곧 번뇌의 업을 끊어냈기 때문에 도리천의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암두 선사는 한때 뱃사공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강둑 양쪽에 목판을 하나씩 걸어놓아서 강을 건너려고 하는 사람이 와서 그 목판을 치면 노를 잡고 춤을 추며 나와서 강을 건네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보살이 아이를 업고 와서 목판을 쳤습니다. 암두 선사는 “누구요?” 하고 나와서 평소처럼 춤추며 와서 배를 갖다 대었습니다. 그러자 보살이 갑자기 아이의 멱살을 잡아 쳐들고서 물었습니다.

“노를 잡고 춤추는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이 아이가 어느 곳에서 왔는가를 말해보시오.”

암두 선사는 말없이 노를 가지고 뱃전을 세 번 쳤습니다.

그러자 보살은 "내가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어도 지금까지 아는 자를 만나지 못했다. 일곱 번째 아이를 낳고 만난 이 자도 역시 신통치 못하구나" 하면서 쳐들고 있던 아이를 강 가운데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 후로 암두 선사는 뱃사공 일을 그만 걷어치워 버렸습니다.

지난날 만약 황벽 선사가 어머니를 반갑게 맞이하고 좋은 시중을 들었다면, 어머니는 황벽 선사를 자랑하는 망상을 일으킨 업보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보살이 아이의 멱살을 잡고 물은 것은, 이 아이를 지금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번뇌가 암두 선사에게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암두 선사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번뇌 망상을 아직 여의지 못했습니다. 이를 알고 있는 보살은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번뇌를 버리라고 아이를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깨달음을 얻은 암두 선사는 소중히 여기던 뱃사공 일을 그만 걷어치워 버렸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어머니와 자식은 곧 이름이고 의미이며, 뜻이고, 느낌이며, 활동과 역할과 작용의 이 마음입니다. 허나 우리는 이 마음을 알지 못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의 티끌 수와 같은 번뇌 망상의 업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 동안 유전하고 진화시킨 버릇과 습관으로 인하여 지옥, 아귀, 축생, 사람, 아수라, 천상의 욕계와 색계, 무색계를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윤회하며 끝없는 고통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조사 스님이 말하기를, “도(道)를 닦고 깨닫기가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손과 물과 얼굴은 물질이고, 물을 손에 묻혀서 닦는 것은 작용의 이 마음으로 바로 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수하는 것이 바로 도이고 마음이므로 도 닦고 깨닫기 세수하다가 코 먼지기보다 더 쉬운 것입니다.

조사 스님들은 말했습니다. "산은 푸르고 철쭉꽃은 붉다. 시냇물은 흘러간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라고 하였습니다. 산이 푸른 것은 산의 작용이고, 붉은 철쭉꽃은 꽃의 작용이며, 흘러가는 것은 물의 작용입니다. 배고픈 것은 배의 작용이고, 졸린 것은 몸뚱이의 작용의 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말을 하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딱딱하고 부드럽고 아프고 가렵다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도(道)이고 이 마음입니다.

또한 눈, 귀, 코, 혀와 목청, 감촉, 생각의 대상이 되는 모양, 소리, 향기, 맛, 아픔과 가려움과 딱딱함과 생각에 대해서 있다 없다, 크다 작다, 예쁘다 밉다, 옳다 그르다, 좋다 싫다 등등의 티끌 수와 같은 분별행위가 곧 도이며 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황벽 선사의 어머니가 먼 길을 수없이 걸은 걸음도 작용이고, 선사의 모든 행위와 어머니의 모든 행동도 작용이며, 암두 선사와 보살과 어린아이의 행위도 작용의 이 마음이므로 하나의 티끌을 비롯한 일체가 바로 이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바르게 알고 깨치면 싫어하는 것은 생기지 않고 좋아하는 것은 사라지거나 멸하지 않는 것이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단군의 홍익정신이고, 예수의 사랑과 부처의 자비이며, 망상의 어둠 세계를 밝히는 동방의 등불 대한민국입니다.

진원 스님 <안동 보현사 스님> 

1949년생으로 덕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하였으며 정각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그간 제방에서 참선수행하였으며 지금은 안동의 암자에서 정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