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억 년 전 좋아하고 싫어하는 우리의 번뇌 망상이 빅뱅을 하고 그 번뇌가 진화와 유전을 계속 반복한 습관과 버릇의 업장이 바로 우주세계이고 우리의 몸입니다. 이에 따라 싫어하고 좋아하는 번뇌 망상의 업장의 몸을 지닌 우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월 동안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생사의 고통을 받았고 지금 또한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이 업장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가?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말했습니다. “우주세계와 몸이 곧 우주세계와 몸이 아니고 이름이 우주세계이고 몸이다.”

그렇습니다. 우주세계와 이 몸은 이름이고, 우주세계와 몸을 구성하는 의미이며, 우주세계와 몸을 표현하는 뜻이고, 우주세계와 몸뚱이에 관한 이름과 의미와 뜻에 따라서 어리석음과 탐하고 화를 내며 부드럽고 거칠고 딱딱하며 차고 더운 느낌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행위와 활동과 작용은 물질이 아닌 비물질이라 하며 이를 마음 또는 성품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고 감촉을 느끼며, 먹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학문을 하고 일하고 재물을 모으고 명예를 높이고, 있다 없다, 크다 작다, 예쁘다 밉다, 더럽고 깨끗하다, 선이다 악이다 하는 등등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행위가 바로 이름이고, 의미이며, 뜻이고, 느낌이며, 그 나름의 활동과 역할과 작용을 하는 이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그렇게 마음이라고 하여 생각으로 아는 것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마음은 깨쳐야 알 수 있습니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번뇌 망상이 딱 멈추면 그때 비로소 이 마음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번뇌를 멈추어서 이 마음을 깨친 조사 스님의 행적을 살펴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청원 유신 선사의 말씀입니다. “이 늙은이가 중생일 때는 산을 보면 곧 산이요 물을 보면 곧 물이었고, 진리를 좀 알게 되니 눈이 차츰 열려 산을 봐도 산이 아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네, 이제 불법을 크게 깨닫고 보니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더라.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각기 다른 것이냐, 만약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노승은 그에게 엎드려 절하겠노라.”

우리는 산과 물을 보거나 그 무엇을 보더라도 근본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청원 선사도 우리들과 같이 싫어하고 좋아하는 번뇌 망상을 지닌 중생일 때는 좋아하는 산과 물, 싫어하는 산과 물이었으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좀 알게 되니 눈이 열려 산을 봐도 산이 아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지혜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이는 산과 물이 곧 산과 물이 아니고 이름이고, 의미이며, 뜻이고, 느낌이며, 그 나름의 활동과 역할과 작용의 이 마음이기 때문에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산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물이라는 생각이 바로 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딱 멈추게 됩니다. 이렇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그만 멈추게 되면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눈은 지금 스마트폰을 보고 있더라도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있다면 스마트폰을 보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지금 다른 생각에 빠져 스마트폰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없으므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어도 못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스마트폰의 실체라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번뇌가 실체가 되므로 스마트폰이 곧 스마트폰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불법을 크게 깨닫고 보니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더라.” 라는 것은 싫어하고 좋아하는 생각이 모두 딱 멈추면 그것이 바로 이 마음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싫어하고 좋아하는 생각이 없고, 없는 것도 없는 이 마음이 산이고 물이기 때문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진리는 글이나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싫어하고 좋아하는 모든 번뇌 망상이 멈추어서 깨쳤을 때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물을 직접 마셔보니 차고 더운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차고 더운 것을 남에게 말해주어야 남이 물이 얼마나 차고 더운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각기 다른 것이냐, 만약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노승은 그에게 엎드려 절하겠노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산과 강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딱 멈춰서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닌 산과 강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번뇌가 없고, 없는 것도 없는 산과 강, 세 가지 견해의 산과 강이 모두 이름이고, 의미이며, 뜻이고, 느낌이며, 그다운 활동과 역할과 작용이 오직 이 마음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견해는 서로 같은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것도 아닙니다. 이 모두가 이 마음의 활동과 역할과 작용이고, 청원 선사가 엎드려 절하는 것도 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하반야 바라밀다」의 뜻이 이와 같습니다. 「마하」는 하나의 미세먼지를 포함한 우주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사물과 크다 작다 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반야」는 공하다 하여 지혜를 말하는데 사물과 사상이 되는 우주세계의 일체 존재가 공하다 하신 것은, 우리들은 「있다」고 하는 우주세계와 우리들의 몸뚱이가 없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우주세계와 몸뚱이를 나타내고 가리키는 것으로 있다 없다, 크다 작다, 생겼다 멸했다, 더럽고 깨끗하다, 싫다 좋다 하는 등등으로 표현하는 사상이 바로 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는 우주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사물과 사상은 곧 이 마음이므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그만 멈추어서 우주세계도 아니고, 몸뚱이도 아닌 것입니다.

「바라밀다」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모두 끊어진 우주세계와 몸뚱이 그것이 바로 이 마음의 깨달음으로 이를 부처라 하고, 모든 망상의 속박과 얽매임에서 벗어난 해탈이며, 모든 번뇌의 불이 꺼져버린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체중생이 부처이고, 이 마음이 부처인 것입니다.

우주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동물과 같이 정이 있는 유정중생과 정이 없는 무정중생으로 산과 강, 스마트폰, 컴퓨터, 건물 등 모든 사물 일체가 이 마음이고 부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음과 부처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싫어하고 좋아하는 분별을 하고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세계에는 본래부터 싫어하고 좋아하는 모든 분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마음과 부처가 무엇인지 모르고 우주세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는 싫어하고 누구는 좋아하며,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하며, 이것은 깨끗하고 저것은 더럽다고 하고, 이것은 밉고 저것은 예쁘다고 하며, 나는 머리가 좋고 너는 머리가 나쁘다고 하고, 이것은 악이고 저것은 선이다 하며, 너는 부자이고 나는 가난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분별의 생각이 어리석고 잘못된 것을 깊이 바르게 알며,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태어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든 고통, 죽음의 고통과 모든 근심과 걱정과 분별의 고통이 곧 이 마음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면 필히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고 깨닫는 것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홍익정신이고, 예수의 사랑이며, 부처의 자비가 미혹의 세계를 밝히는 등불입니다.

진원 스님 <안동 보현사 스님> 

1949년생으로 덕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하였으며 정각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그간 제방에서 참선수행하였으며 지금은 안동의 암자에서 정진중이다.